2015 일본 수학여행 기행문

2015 일본 수학여행 기행문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모리구찌 선생님께서 나가사키 폭심지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 때 우리가 딛고 있던 땅은 당시 81채의 집이 있던 마을이었고 지금은 다 덮혀 그때로부터 2m 높아진 곳이었다. 원폭 투하 후 미국에서 증거 인멸을 위해 불도저로 땅을 덮어 버린 것이다. 그 말씀을 하시면서 이렇게 우리의 역사도 덮어버렸다고 덧붙여 말씀하셨다. 우리가 수학여행을 와서 이렇게 배우는 이유는, 지금 이 딛고 있는 땅 밑에 그 마을을 보기 위해서, 그 너머의 진실을 보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배우는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말씀이다. 우리가 하는 공부의 목표를 명확하게 정리해주신 말씀이었다고, 또한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이번 여행이 그 목표로 향해가는 소중한 한 발짝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곳을 갔지만 오오츠보 마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구 오오츠보 마을은 재일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조선인 부락이다. 일본인들이 다가가기 쉽지 않았던 지역으로 소위 "똥굴동네"라 불리우며 일본인들에겐 무서움의 대상이었고 천시받는 동네였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처음 느낀 마을은 여느 일본 동네가 그렇듯 아기자기하고 정겨운 느낌이었다. 마을 중턱에 있는 절에서 큰 종을 둘러싸고 이곳에 살았던 조선인들의 이야기,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그들에 대한 심한 차별과 깊은 편견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마음 아픈 이야기를 하시면서 통역을 해주신 김령순 선생님께서 '그럴수록 조선인들은 더욱 더 뭉쳐 힘을 냈고, 몇 십 년을 꿋꿋이 지켜내오고 있다.'란 말씀을 하셨다. '꿋꿋이 지켜낸다' 하는 말을 마음속으로 다시 되새겼다. '꿋꿋이', '지킨다' 라는 두 단어에서 오는 '고단함'이 나를 너무 마음아프게 했다. 이 느낌이 그 이후의 여행내내 순간순간 울컥하게 만들었다. 고단하고 서러운 마음을 참고있는 듯한,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 이방인의 삶을 다시 살다가 울다가, 또 살아내고. 그런 마음을 생각해보니 마을이 달라보였다. 물론 지금은 많이 변한 곳이지만 괜히 힘에 부쳐 보이기도 했고, 그만큼 단단해 보이기도 했다. 절에서 나와 다시 마을 입구로 내려오는 중에 재일 조선인 1세 할아버님과 할머님을 만나뵀다. 설명을 들으며 울컥했던 마음이 그때 우리를 너무 반기며 나오시는 두 분을 뵀을 때 참기 힘들었다.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모두 그런 것 같았다. 그 장면이 아주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 같다.

어찌보면 이번 여행의 테마는 재일조선인들의 삶이다. 전쟁이 일어났고, 약자는 당했고, 강제로 징용되어 타국땅에 와 인권이 짓밟힌채 살고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 역사가 깃들어 있는 오오츠보 마을을 걸으며 지금도 곳곳에, 내 마음속에 있는 차별도 생각했다. 우리나라에도 만연한 중국 조선족,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나는 불가리아란 나라에서 살고 있는 학생으로 3년간 너무나도 많이 느꼈던 집시들에 대한 편견도 생각했다. 재일 조선인들이 받는 차별은 이보다 더 복잡하고 또 다른 맥락일 수 있지만 이렇게 문화차이, 생김새 차이, 국가의 차이 등으로 인한 현재의 차별 또한 아직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 무뎌져버린 우리들의마음이 바뀔 수는 없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올해는 해방 70주년을 맞는 해이다. 우린 여행 중에 2015년의 광복절을 보냈다. 내 개인적으로는 정교회 신학을 배우고 있는 사람으로서 8월 15일은 한가지 더 의미를 갖는 날이다. 정교회에서는 8월 15일이 '성모 안식일'로 지켜지고 있다. 성모 마리아의 대표 축일이다. 나는 세례명으로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 나에게 특히나 의미 있는 날이기도 하다. 기쁜 날이 겹치다보니, 자연스럽게 두 날을 연관지어 생각하게 된다. 성모 안식일, 즉 성모 마리아가 육체의 죽음을 맞아 안식에 들고 영혼의 삶을 시작한 날이다. 카톨릭에서는 성모 승천일이라고 하는데, 정교회에서는 승천보다도 '안식'이라는 것에 더 중점을 두어 이렇게 부른다. '안식'. 비록 육신은 돌아가셨지만,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낳으시고 손가락질 받으며 낮고 천한 곳에 사시다가 결국엔 아들의 죽음을 보시게 되기까지 고된 삶 속에서 해방 되어 영원한 삶으로 들어서신 날이다. 고된 삶 속에서 '해방'됐다는 것에서 우리의 광복절과 공통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하며 느낀 점은 지금 저 땅속에 묻혀있는 분들은 여전히 한과 서러움을 안고 계시다는 것, 아직 진정한 해방을 얻지 못하셨다는 것이다. 억울하게 끌려와 온갖 고통속에 지옥을 사셨던 분들이 여전히 그자리에 계시고 70년이란 시간이 지날동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것을 보면서 온전히 기뻐할 수 없는 그런 날이었다.

'광복.' 빛을 되찾은 날. 빛을 되찾았다고 하는데 돌아가신 그분들은 아직 탄광 속 처럼 어두운 곳에 계신다. 오다야마 묘지에 갔을 때 특히 더 뼈저리게 느꼈다. '상상해보라'는 주문홍 목사님 말씀따라 하나 하나 상상해보니 그 표현할 수 없는 억울함이 원통해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제대로 된 사과는 커녕, 심지어 누가 여기에 묻혔는지 알지 못하고, 그 수도 알지 못한다. 수십년이 지났지만 친일의 후손들이 정권을 잡고 아직도 국가의 무관심 속에 계시다. 진정한 의미의 해방이 금방은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플뿐이었다.

2009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주제로 다녀온 이후 이번이 아힘나 학생들과 떠나는 두 번째 여행이었다. 그 때 받았던 슬프고 먹먹한 느낌이 아직 오래 남아 벌써 6년이란 시간이 지났나 생각했다. 그때만큼 내가 턱없이 무지하고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해 소중히 배워 오리란 마음으로 떠났고, 역시나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감정들을 느꼈고 배웠다.

세 기업을 주축으로 일궈낸 일본의 근대화, 그 근대화와 전쟁에 이용되고 버려진 수많은 조선인들, 그 과정에서 묵살된 인권,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일본, 여전히 규명되지 못한 많은 진실들- 이것들의 연결과 흐름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역사적인 지식 뿐 아니라, 우리를 반겨주신 일본분들, 땀 뻘뻘 흘리며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시기 위해 뛰어 다니신 어르신 선생님들, 우리에게 고맙다고 말씀해주시는 재일조선인분들, 공항까지 마중나와 주시고 배웅해주신 분들... 그 분들에 대한 큰 존경심과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함으로 여행내내 따뜻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다.

우리가 묘지에서 또 사진 속에서 만난 그 분들의 이야기가 여전히 이어져 오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긴 여행이었고, 그것을 알리고 밝히기 위해 일하고 계신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는 감사한 시간이었다. 이렇게 배워 나가면서 지금은 역사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고 싶다.

 

*글쓴이 한지영은 현재 불가리아 벨리코떠르노보 대학 정교회학부 교회예술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다. 아힘나평화학교 학생들과 함께 하는 일본역사기행은 이번이 두번째로 2009년 간토학살현장에 이어 올 여름 일본평화기행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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