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6년 4월 12일 안성신문에 쓴 기사

아힘나 아이들이 평화를 찾아 떠나는 역사기행을 하였다.
아힘나 평화학교 교육목표의 핵심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Peace Builders)으로 성장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아힘나 평화학교의 교사들은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의 동북 아시아는 과연 평화로운 세상일까?' '누가 아시아를 평화롭게 만들어가려 하는가?' '아이들은 미래 자신들이 주역으로 살아갈 시대의 평화 만들기를 과연 어른들에게만 맡겨둘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며 아이들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나라의 아이들은 작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평화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생각 아래, 평화를 찾아 떠나는 역사기행을 시작하였다. 

지난 4월 1일부터 4일까지 제주 4·3 역사현장과 갈등을 화해로 풀어가는 제주도민들의 과거와 현재를 만나고, 그리고 한 주 뒤에는 경기도 광주 퇴촌의 '일본 위안부 역사관'을 찾아 한일 교과서 왜곡과 이를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 시민들의 갈등과 화해의 노력을 체험으로 느낄 수 있는 여행이었다. 

과연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본,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제주 4·3의 역사와 여전히 불씨가 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왜곡을 몸으로 증언하는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제주도를 다녀와서
 
우리들은 제주도에 가기 전에 제주 4·3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그 다큐멘터리에서 어떤 언니들이 제주 4·3에 관련된 곳들을 찾아가서 자신들이 왔다간 흔적들을 남기는 장면들을 보았다. 한 군데마다 일일이 정성스레 조그마한 마을도 만들어 남겨두고, 학을 실에 매달아 연결시켜놓고 하는 것들을 보고 내 마음에 와닿았다.

그리고 제주도에 가기 전에 미리 다카하시 선생님과 미유, 우미가 뜰로 왔었다.
처음 보는 일본인이어서 많이 낯설었다. 말도 안 통하는 일본인과 제주도에서 어떻게 4일을 같이 지낼지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었다.
 

▲  4.3 역사 기행 첫 날 - 바람 몹시부는 제주 애월에서   © 아힘나


드디어 기다리던 4월 1일이 되었다. 아힘나 평화학교 7명의 학생들과 동산 선생님, 담별 선생님, 아하 선생님과, 메테루 선생님, 운냐 선생님, 다카하시 선생님 (일본인 선생님)과 미유, 우미(일본인 학생)들과 같이 제주도로 갔다. 제주도에 간 이유는, 제주 4·3에 대해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제주도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제주 민속 자연사 박물관에 갔다. 그곳에서 메테루 선생님과 운냐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삼성혈부터는 일본인 선생님 세 분과 미유와 우미와 같이 동행하게 되었다.

물론 제주도에서 영모원, 자리왓, 천지연폭포, 알뜨르 비행장, 산방산, 산굼부리, 백조일손지묘 등 많이 가보았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두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백조일손지묘와 산굼부리다. 백조일손 지묘의 뜻은 '조상이 다른 백서른두 할아버지 자식들이 한날 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키어 하나가 되었으니 한자손'이라는 뜻이다. 132분이라…, 아주 많은 분들이 묻혀 계시는 곳이다.

이곳에는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언니들이 만들고 간 조그마한 마을의 모형이다. 이 모형을 보면서 언니들의 마음이 돌아가신 많은 분들의 가슴속에 닿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곳에서 내 목에 걸고 있던 아힘나 목걸이를 바치고 왔다. 그리고 묵념을 했다.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임수진 (아힘나 평화학교 중1)

 


 


앞으론 우리나라가 정신 차리고 똑바로 나섰으면 좋겠다
 
일본인 다섯 명과 한국 일곱 명, 그리고 조선(북한) 세 명으로 구성된 기행단이 제주 4·3의 역사를 배우러 3박 4일 동안 갔었다.

제주도를 가는 비행기라서 그런지 사탕하고 종이컵 한 잔만 주는 게 참 섭섭했다. 그래도 비행기가 날씨로 인해 덜컹거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지만 나는 그게 더 재미있었다.

4·3을 집중적으로 배운 날이라 기억에 많이 남는데, 그 중에서 기억이 많이 있었던 곳은 '백조일손지묘'인데, 4·3 학살에 의한 흔적이 많이 남은 것 같다.

제주 모슬포에서는 1950년 한국전쟁(6·25)이 일어나자, 1947년 3·1시위 사건과 4·3을 거치면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검거령이 내려졌다. 무고한 이분들은 당시 대정면 상모리에 위치한 절간고구마 보관창고에 수용되었다가 1950년 8월 20일(음 7월 7일)에 섯알오름에서 모두 처형되었다 한다. 그후 7년 동안 삼엄한 경비 속에 가족들은 아예 접근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백조일손지묘는, 1957년 처형된 뒤 7년 동안 방치되었기에 누구의 시신인지 알아볼 수 없었던 유족들이 뜻을 합하여 유골을 거두고 묘지를 구입하여 한곳에 시신들을 모신 곳이다. 즉, '백 분의 할아버지 밑에 한 자손'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억울한 죽음들을 한곳에 모신 3년 뒤, 유족들이 '百祖一孫之墓'라는 비석을 세우고 그 후면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넣었으나 그 비석마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부에 의해 두 동강이 나고 땅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지난 1992년 4·3 민간인 유족회에 의해 건립된 위령비가 있다.

 

 

▲     © 4.3 사건으로 인한 갈등, 남북분단극복을 비는 위령당(제주도)


제주도의 사람들이 남과 북이 갈라져선 안된다는 것을 알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투표를 반대하였고, 나는 옳은 일을 하였다고 본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희생당하고 게다가 아무 관련 없는 사람들이 희생자 중 90%라고 하는 기록을 보면서 정말로 앞으론 우리나라가 정신 차리고 똑바로 나섰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곳에 아힘나 목걸이를 바치고 묵념을 하였다. 4·3의 비극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4·3에 희생된 제주도민들에게 더 이상 슬퍼할 일이 없도록 기도한다.

전지용 (아힘나 평화학교 중1)

 

 


 


몇 번을 듣고 듣고 또 들어도 우리의 역사는 슬프고 아프다

 

 

 

 

▲     © 퇴촌 일본군위안부역사관에서 


나는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을 돌아보면서 슬펐고,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역사관을 돌면서 글도 많이 읽어보았다. 할머니들의 사진들도 많이 보았다.

조선 여성이 일본군에게 잡혀 배를 타고 일본까지 끌려가서 반복되는 성폭행을 당한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들이 직접 그린 그림도 보았다. 기억에 남는 것은 조선 여성이 버섯을 캐다가 일본군인의 손에 잡혀가는 그림이다.

또한 일본군이 배를 따먹는 장면을 그린 그림에서 그 배에는 조선 여성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일본군들이 조선 여성들을 배 따먹듯이 쉽게 폭행하였음을 상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 일본 군인들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그리고 끔찍하게 느껴진다. 다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역사관에는 일본 사람들도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역사관을 방문하는 일본 사람들은 죄송하다고 사죄하곤 한다. 솔직히 그들은 잘못한 것이 없지만 그래도 일본 사람이기에 미안하다고 편지도 써놓고 가고 종이로 학을 몇 천 개씩 정성들여 만들어 걸어놓고 간다. 나는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일본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와서 미안하다고 할까 하는 생각 끝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기가 일본 사람이니까 예전 일본군들을 대신하여 그러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일본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좋고 따뜻하다고 느껴진다.

일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편지를 쓴 것을 김령순 선생님이 우리말로 풀어서 읽어주었다. "자기는 일본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부끄럽지만 앞으로 위안부 역사관에서 느낀 것들을 잊지 말고 진상을 밝혀내는 일들을 돕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과 강제로 끌려간 수많은 조선 사람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로 마음이 아프다. 그들이 슬픔과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특히 조국이 해방되어서도 자기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그 슬픔은 정말 애타다.

 

 

▲     © 일본군위안부역사관 - 대지의 여신상을 바라보는 소연


몇 번을 듣고 듣고 또 들어도 우리의 역사는 슬프고 아프다. 그런 역사를 다름아닌 우리 청소년들이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위안부 역사관을 찾아가서 다시 한번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어 좋았고, 내 기억 속에 깊이 남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인 이런 일들을 알지 못하고 이제서야 조금씩 알게 된 것이 미안하다. 앞으로는 더 잘 배우겠다고 결심을 다지며 돌아왔다.

왕소연 (아힘나 평화학교 중1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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