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논밭 복판에 유곽 풍해루·은월루… 전쟁 이전부터 ‘비명 소리’

넓고 완만한 언덕에 푸른 논밭이 펼쳐지고, 그 사이사이에 집들이 건성드뭇하다. 그런 반농반어(半農半漁) 마을 구석의 언덕 위에 그 건물은 덩그러니 서 있었다.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방진동. 북한이 ‘위안소를 발견했다’고 발표한 그 자리에는 일제시대에 지은 ‘위안소’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일본군 위안소로 이용된 은월루가 지금도 거의 그대로 남아 있으며, 현재는 마을 진료소로 사용되고 있다. | 사토 나오코 제공


두 군데 있었던 방진의 위안소는 각각 ‘풍해루(豊海樓)’와 ‘은월루(銀月樓)’라고 불렸다. 당시 경성 등 큰 도시에 많았던 ‘유곽’으로 흔한 이름이다. 주변에는 건물다운 건물이 없었다. 그러나 방진의 풍해루와 은월루는 논밭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항상 일본 헌병의 감시를 받고 마을 사람들이 다가갈 수도 없었다. 멀리 여자들의 교성인지 비명인지 모르는 소리가 잘 들리기도 했으나 당시 가까이 사는 마을 주민들은 술집 따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20명이나 되는 여자들이 감금 상태로 하루 10명 이상 병사들을 상대했던 위안소였다는 것을 방진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은 해방 직후였다. 일본군은 물론 풍해루 주인마저 떠난 뒤 거기서 일했던 여성들 가운데 몇몇이 고향에 돌아갈 돈도 없이 헤매고 있던 것을 마을사람들이 돌봐줄 때 처음으로 그녀들이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성들은 모두 한국인이었고, 주로 강원도나 원산 출신이었다. 그러나 ‘기모노’나 ‘간탄후쿠’라고 불리는 원피스를 입혔고 한국어도 금지당했다. 헌병이 감시했기 때문에 가끔 건물 앞의 하천으로 빨래하기 위해 나가는 것 이외에는 외출도 제대로 못했다. 점심 때부터 저녁 6시까지는 병사들이 몰려와 평균 10명 이상 상대를 했으며, 밤 8시 이후에는 장교들에게 시달렸다. 식사는 보리밥과 비지, 단무지, 소금물 정도였다. 일주일에 한 번 근처에 있는 민간 진료소의 군의가 와서 성병검사를 했다. 주인이나 병사들에게 반항하면 두들겨 맞았고, 또 실제로 도망가려고 했던 여자를 병사들이 죽인 사건도 있었다.

풍해루에서 20m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던 신낙천씨(1930~2007)는 당시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열 살 때쯤인가, 어머니가 “가지마라”고 했던 풍해루 건물에 호기심이 일어 다가가 안을 들여다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였기에 헌병들은 막지도 않아 거기에 다가설 수가 있었다. 그가 일본식 가옥의 낮은 창문에서 들여다봤을 때, 마침 여자 얼굴은 왠지 하얀 옷감으로 가려져 있었고, 그 위에 군복을 입은 군인이 있는 것이 보였다. 마루에서는 “빨리 해!”라는 고함 소리나 문을 세게 차는 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이 방을 나가면 여성들은 분홍색 액체로 성기 부위를 씻었다. 그 액체가 소독에 사용하는 과망간산칼륨이었다고 알게 된 것은 그가 의사가 된 뒤였다.

군사성격 강한 함경북도 방진, 1938년부터 ‘군전용 시설’ 관리
경찰 아닌 헌병이 여성들 감시… 전쟁터 위안소와 다를 바 없어


은월루는 1935년에 일본 건설업자가 노동자를 위해서 설립한 성매매시설이었는데, 군이 배치된 후에 ‘군전용’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경영자는 50세가량의 일본인 여성이었다. 은월루 건물은 지금도 거의 그대로 남아 있으며, 마을 진료소로 사용하고 있다. 1938년 건립된 풍해루의 경영자는 원산 출신의 윤두만이라는 한국인이었다. 현재 풍해루가 있던 자리의 건물은 새로 지은 것이지만, 토대의 콘크리트 틀은 당시 그대로 남아 있다. 두 건물은 걸어서 몇 분 거리에 있다.

원래 작은 한촌에 불과한 방진에 왜 20명의 여자들이 일하는 큰 시설이 두개나 있었을까? 풍해루와 은월루는 일반인은 이용할 수 없는 군인전용의 성매매시설이었다는 점, 헌병이 여성들을 감시했었다는 점, 여성들에게 하루에 수많은 남성 상대를 강요했다는 점, 민족성을 말살하고 여성들에게 기모노나 일본어를 강요했다는 점 등을 보면, 전쟁터에 있던 ‘위안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일반적으로 위안소 유형은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군이 직영하는 위안소, 군이 관리·통제하고 업자들이 경영하는 군인전용 위안소, 민간의 매춘소를 지정해서 일정 기간 군이 이용하는 군 지정 위안소가 그것이다. 즉 군이 얼마나 설립·경영·통제에 관계했는가가 위안소인지 일반적인 성매매시설인지를 나누는 기준이라는 것이다.

일제시대 한국에서 성매매시설은 ‘유곽’, ‘특별요리점’, ‘가시자시키(貸座敷)’ 등 다양한 종류가 있었으나, 지금까지 피해자 증언 외에 위안소라고 증명할 수 있는 구체적 건물이 한반도 내에서 확인된 적은 없었다. 피해자들 가운데 부산이나 제주도에서 ‘위안소에 있었다’고 증언한 경우는 있었으나, 그 성매매시설이 군이 얼마나 관여하고 있었는가 하는 증언 외에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은 이 풍해루와 은월루에 관해서도 위의 증언 외에 군이 직접 통제 또는 관여했다는 문서 같은 물증은 발견하지 못했다. 방진에는 일본군이 주둔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해방 직후 일본정부가 식민지의 군 관련 자료를 소각하라는 명령을 내린 탓에 한반도에 주둔했던 부대에 관해서는 제대로 된 자료를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방진에 정기적으로 많은 군인이 다녔다는 사실은 다른 자료로 입증할 수가 있었다. 방진은 일제시대 때 풍해면 대유동 이리에 있었는데, 방진 바로 옆에 ‘유진’이라는 동네가 있었다. ‘나진방면특별근거지대 전시일지’(일본 방위청 전사자료실 소장, 1945년)에 따르면, 유진에는 작지만 일본 육군, 해군 시설이 건설되었고, 유진항은 전용 군항으로 이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군 위안소 풍해루가 있던 자리에 새로 지은 건물 전경. 토대를 이룬 콘크리트 틀은 당시 그대로 남아 있다. | 사토 나오코 제공


일본군 직접통제 물증 없지만 방진에 군인 출입자료 확인
위안소는 전쟁 책임뿐 아니라‘식민지배 책임’으로도 접근해야


나진방면특별근거지대는 진해 경비부에 부속하는 작전부대였고, 동해안 경비나 대소련 경계를 주된 임무로 했었는데, 그 상륙지가 유진이었던 것이다. 해군병사들이 상륙해 위락거리를 찾을 경우, 유진에 가장 가까운 도시가 나진이지만 나진은 유진에서 20㎞나 떨어져 있었다. 이 때문에 유진에 상륙한 해군 병사, 사관, 헌병들은 유진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방진까지 위락거리를 구하러 왔던 것이다.

군인들이 사용하는 위락시설, 특히 위안소 같은 곳에서는 군인들의 성병 만연 방지를 위해 군의가 여성들의 성병검사를 한다. 또한 군기밀 유지와 도주 방지를 위해 그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에 대한 감시도 엄격해진다. 감시를 경찰이 아닌 헌병이 담당했다는 것은 이용자가 군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전쟁 시기에 일반인들의 이용을 금지한 풍해루와 은월루는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위안소였다고 할 수 있다.

일제 초기부터 군사적 성격이 강한 방진에서는, 1938년이란 비교적 이른 시기에 군인 전용의 ‘성위안시설’을 관리하고 있었다. 함경남북도의 군사적 상황을 감안해 보면, 다른 지역 특히 국경지대에서 비슷한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은 크다. 즉 위안부 제도는 전쟁뿐만 아니라 식민지 지배에도 구체적으로 관련된 문제인 것이다.

이처럼 ‘위안소’ 제도가 식민지지배와 깊이 관련됐다는 점이 밝혀짐에 따라 일본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전쟁 책임’뿐만 아니라 ‘식민지지배 책임’의 일환으로도 접근해야 한다. 한국이나 일본이 자료수집이나 증언수집, 현지조사, 자료 분석 등을 토대로 폭넓은 연구를 진행해 온 것과는 달리 북한 측은 자료가 많은 일본이나 한국, 미국에 가 자료 수집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연구가 제대로 안돼 있는 실정이다. 위안부 문제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서는 아직 많은 과제가 남아 있는 셈이다.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1990년 11월16일 결성된 단체이다. 우리 사회에 위안부문제를 제기해 국제여론을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남북연대활동과 아시아연대회의를 조직하는 한편 유엔과 국제노동기구(ILO)에 위안부 문제를 환기시켜 일본정부에 공식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권고를 이끌어냈다. 해외 동포, 국제 인권단체들과 연대해 미국, 유럽연합(EU), 캐나다, 네덜란드 등 세계 여러나라 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을 얻어내기도 했다. 피해자 신고전화를 개설해 피해자들이 반세기의 침묵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하는 역할도 했다. 피해자들을 위한 복지활동과 더불어 피해자들의 쉼터 ‘우리집’을 2003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한국정신대연구소와 함께 피해자들의 경험을 구술로 채록, 증언집으로 발간했으며, 학자들과 공동으로 위안부 제도에 대한 연구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일본정부에 진상 규명, 공식 사죄, 법적 배상, 책임자 처벌, 교과서 등재 등을 요구하면서 일본국회에서의 입법운동도 벌여왔다. 아울러 국회결의안 채택, 국가인권위원회에서의 인권문제 제기, 헌법재판소 헌법소원심판청구를 비롯해 한국정부와 국회 등을 상대로 청원해왔다. 그 결과 위안부 피해자생활안정지원법이 제정됐다. 1992년 1월8일부터 시작한 수요정기시위는 18년을 지나 915회를 넘기도록 끈질기게 진행돼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다. 2004년부터는 위안부에 관한 역사 교육 실시와 병행해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건립을 위해 부지를 확보한 뒤 모금활동을 해오고 있다.

■ 글쓴이 사토 나오코는

사토 나오코는 한국 근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로, 위안부나 노동력 동원 등 일제시기 동원 문제를 집중 탐구해 왔다.



<경향신문 · 국치100년사업공동추진위원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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