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노 히데키 | ‘한국강제병합100년 공동행동’ 일본실행위원회 사무국장

ㆍ야스쿠니 합사 정부관여 인정한 日법원 “책임은 못물어”

2001년 6월29일, 이날은 일본에서 진행된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 소송의 역사에서 뜻 깊은 날이었다. 일제 강점기 군인·군속 출신의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252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피해 보상, 야스쿠니 합사 철회를 요구하는 대규모 집단소송을 벌인 것이다. 1년여간 소송지원단과 변호사, 피해자와 유족들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휴일도 없이 만나 원고들의 신상 파악과 진술서 작성, 번역에 매달렸다. 소송 진행을 위한 모금활동도 함께 벌였다. 이 과정에서 십수년 동안 일본에서 강제동원피해자 소송 지원운동을 해왔던 많은 사람들이 이 재판 운동으로 결집했다. 이렇게 시작된 재한 군인·군속재판(이하 군군재판)은 2003년 6월12일 164명의 원고가 추가로 제소해 원고 수가 모두 416명으로 늘어났다.
 

야스쿠니반대 한일 공동행동 시위대가 2007년 11월 뉴욕 유엔본부 앞에서 행진하고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원고의 규모면에서도 그렇지만 제소한 내용이 강제동원 피해 전반에 걸쳐 있어서 언론의 관심도 매우 컸다. 청구 취지가 ‘생사 확인, 유골 반환, 미불금과 군사우편저금 반환, 야스쿠니 합사 취소, BC급 전범과 시베리아 억류자에 대한 손해배상’ 등이어서 내용상 한·일 간의 강제동원 피해 문제에 대한 ‘총결산’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2006년 5월 1심 판결, 2009년 10월 항소심 판결에서 모두 원고 패소로 끝나 지금은 대법원에 계류돼 있다. 이제 곧 제소한 날로부터 10년이 되지만 일본 사법부를 통한 문제 해결의 전망은 매우 어둡다.

그렇지만 10년간의 법정 싸움은 헛되지 않았고, 또 그래야만 한다. 이 10년간의 싸움을 되돌아보면 군군재판이 법정을 넘어 일본사회에 던진 문제 제기와 의미는 더없이 소중하다. 그러기에 군군재판의 의미를 되짚어보고 그 의의를 다시 확인하는 것도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2001년 6월의 제소 이후 1심에서만 20번에 걸쳐 변론이 열렸다. 변론 때마다 한국의 원고들이 도쿄로 와 법정에 참석했고, 의견진술을 했다. 변호인단은 야스쿠니 합사는 ‘민족적 인격권’에 기초해 취소돼야 하며, 유골 반환은 한일청구권협정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문제로 일본 정부에 그 책임이 있고, 한국병합조약은 처음부터 위법·무효이므로 징병과 징용 그 자체가 위법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피고인 일본 정부는 사실이 맞는지 틀린지를 따지지도 않고 시종일관 ‘한일청구권협정에서 문제는 다 해결되었다’는 태도만 취했다. 야스쿠니 합사 취소 청구에 대해서는 ‘합사한 것은 야스쿠니 신사 쪽이지 국가는 관계하지 않았다’라고 답변했다.

2006년 5월, 도쿄지방법원은 원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한일청구권협정과 법률144호(일본 국내 조치법)로 원고의 청구권은 이미 소멸됐다는 것이다. 한일청구권협정 체결 과정에서 다루지 않은 시베리아 억류자와 BC급 전범 문제 역시 같은 이유로 기각했다. 야스쿠니 합사에 대해서만은 한일협정으로 해결했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 국가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하기 위해 수행한 전몰자 통지와 같은 행위를 ‘일반적인 행정의 범위 안에서의 행위’라 하여, 야스쿠니 합사에 대한 국가의 관여와 공동 불법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완전히 부당한 판결이었다.

2009년 10월 항소심 판결 역시 1심 판결을 답습하는 수준이었다. 야스쿠니 신사와 관련된 내용은 오히려 퇴보했다. 항소심 과정에서 일본 국가가 야스쿠니 신사 합사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 결정적인 자료가 확인됐다. 1956년 후생성이 인양원호국장(引揚援護局長) 이름으로 각 지방에 보낸 ‘야스쿠니 신사 합사사무에 대한 협력에 관하여’라는 문서나 오키나와 등에 보낸 연락문서를 보면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가 함께 합사를 추진했음이 명백해졌다. 항소심 재판부도 일본 국가가 ‘예산을 세우고 요강을 정해 조직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야스쿠니 합사를 지원한 행위는 ‘일반인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행위로서 적절했다고는 할 수 없다’며 일본 정부의 관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야스쿠니와 하나가 되어 합사를 했다고 평가할 수 없다’며 일본 국가에 합사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난센스 판결’을 내렸다. 이 부조리와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법정 투쟁의 과제로 남아 있다.

군군재판 투쟁은 법정 밖의 한·일 민중 속에서도 전개되었다. 군군재판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원고들의 투쟁, 그 삶을 그린 기록영화가 제작되었다. ‘안녕, 사요나라’ ‘60년의 고독’ ‘60년의 슬픔’ 등이 그것이다. 이 영화들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민족문제연구소와 군군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이 연대해서 공동으로 제작한 것이다. 이들 기록영화를 통해 일본과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한국인의 야스쿠니 합사와 시베리아 억류자 문제, 우키시마마루 사건 유족들의 슬픔을 알게 되었다. 자연히 한·일 민중의 교류와 연대가 더 확대되고 깊어졌다.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은 많은 지원자와 함께 춘천 납골당 청소 여행, 한·일 친선 축구대회 등을 기획하고 실시했다. 지원하는 모임은 재판 이외에 전사자들에 관한 상세한 정보의 제공, 유골의 소재 확인과 반환을 위해 후생노동성, 외무성과 직접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일본 국회 안에서 원내집회도 열고 군군재판 원고들의 호소를 국회의원들이 듣게 해 정치적 해결을 촉구하는 일을 추진했다.

10년간의 군군재판 투쟁은 일본 정부의 태도를 바꾸고 사회를 변화시켜 왔다.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태도를 취한 일본 정부도 유골문제만은 그대로 둘 수 없어 민간징용자의 유골조사, 우키시마마루사건 피해자의 유골반환 등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더 큰 성과는 일본군국주의의 상징이자 뿌리인 야스쿠니 신사 문제를 일본 사회에 정면으로 제기했다는 점이다. 일본, 한국에서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위원회가 결성되고, 대만, 오키나와, 일본의 민중들과 함께 합사 취소를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2006년 도쿄에서 반야스쿠니 촛불시위를 시작으로, 2007년 뉴욕공동행동, 2008년 제2차 도쿄행동, 2009년 제3차 도쿄행동으로 이어졌으며, 2010년의 촛불시위도 준비 중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야스쿠니 신사도 영새부에서 완전 삭제를 요구하는 원고들에게 ‘검토한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말하는 취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군군재판 싸움은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법정에서일 뿐이다. 지난 10년을 돌아보고 새로운 준비를 하면서 그 과제를 재확인해 두고 싶다. 우선 법정투쟁이다. 항소심에서 야스쿠니 합사문제에 관한 새로운 증거를 내 일본 정부의 거짓을 폭로했다. 도쿄고등법원도 국가의 행위가 ‘적절하지 않았다’고 인정했지만, 끝내 국가의 정교분리 위반행위에 면죄부를 줬다. 이 판결의 부당성을 끝까지 추궁, 법적 정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야스쿠니 합사 취소를 실현하는 일이다. 강제동원 진상규명 과정에서 많은 한국인 군인·군속들이 살아서 돌아갔는데도 전사했다며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한 사실이 드러났다. 군군재판과 ‘노! 합사’ 재판의 원고 중에도 생존자가 있다. 이런 분들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채로 그냥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을 돌파구로 해 한국인 합사 취소를 요구하는 운동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셋째, 유골조사·반환을 진척시켜야 하다. 지지부진하지만 일본 정부도 이 일을 추진하고 있다. 이 일이 더욱 활성화되도록 일본 정부에 촉구해야 한다. 유족들의 한을 풀기 위해서도 최소한의 인도적인 조치는 취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모든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사죄와 보상을 하도록 일본 정부에 요구해 나갈 것이다. 공탁금은 지금도 재무성이 보관하고 있다. 군사우편저금도 남아 있다. 이것을 ‘종잣돈’으로 해서 보상하는 것은 가능하다. 한일청구권 협정에 따라 재산권·채권채무 문제가 해결됐다고 하더라도 강제연행, 강제동원의 불법성은 소멸되지 않았다. 많은 한국·조선 사람이 입은 정신적·육체적 피해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것을 실행할 책임이 일본 정부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 글쓴이 야노 히데키는

일본 시민운동가인 야노 히데키는 주로 한·일과거사 청산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1970년대에는 학생운동, 80년대에는 노동운동에 참여했으나, 90년 이후 한국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강제동원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문제 해결을 위한 재판지원 활동을 해왔다. 96년 12월부터 강제연행기업책임추구재판전국네트워크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2010년 1월부터는 강제병합100년공동행동 일본실행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 재한 군인군속 재판 지원회

변호인단과의 연락과 소통, 법정 대책, 비용 지출을 비롯해 재판의 원고들을 지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결성된 일본인들의 조직이다. 회원수는 약 400명이며, 격월간 뉴스 ‘미래로의 가교’를 발행하고 있다.(현재 57호) 한국인 원고들이 일본에 오면 재판을 방청하고 집회를 여는 것은 물론, 해마다 가을에는 강원도 춘천시에 있는 ‘강제연행피해자 납골당’ 청소봉사 여행을 하고 있다. 겨울마다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를 초청해 ‘김치(담그기) 교실’을 여는 등 한·일 민간교류를 넓혀가고 있기도 하다.

이 모임의 가장 큰 활동으로는 2005년 을사늑약 100년을 기억하며 제작한 기록영화 「안녕, 사요나라」 상영운동을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한·일 시민단체의 공동제작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큰 데다 야스쿠니 신사의 실상에 관한 공감대를 확산시켜나가고 있다. 홈페이지:http://www.gun-gun.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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