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미래,국치100년사업공동추진위원회 김효순공동대표의 칼럼

봄비가 심술궂게 뿌리던 지난 25일 오후 서울 향린교회에서 ‘진실과 미래, 국치 백년 사업 공동추진위원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일제의 조선 강점 백년이 되는 2010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를 놓고 학술·시민단체 수십 곳의 실무 주역들이 몇 달 동안 지속적인 토론을 거친 끝에 출범시킨 것이다. 행사장에는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민속학자 심우성, 사학자 이이화, 박재승 전 변협 회장 등 원로들과 고령의 피해 당사자들이 나왔다. 정부 수립 이후 친일 경찰을 쫓아내려다 모함을 받아 처형된 최능진의 자제인 최만립 전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의 모습도 보였다.

 

아쉽게도 이 행사는 극히 일부 인터넷 언론을 제외하면 보도되지 않았다. 진정한 친일 청산 요구는 결코 고장난 레코드의 되풀이 재생이 아니다. 얼마 전 국방부가 군 원로인 백선엽 장군을 ‘명예원수’로 추대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발표한 대목에서 나는 본말이 뒤바뀐 가치 체계의 끈질긴 생명력을 절감한다.

백 장군은 국내보다 국외에서 평가가 높은 군인이다. 영어와 일어판으로 여러 권의 저서가 나와 있다. 창군에 기여한 군인 중에 그만큼 화려한 경력을 가진 인사를 찾기 힘들다. 그가 회고록에서 언급한 일제 때의 군 경력은 아주 간략한 편이다. 봉천(현재의 선양)의 만주군관학교를 마치고 1942년 봄 임관해 자무스 부대에서 1년간 복무한 후 간도특설대의 한인부대로 전속됐다. 3년을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으며 그동안 열하성과 북경 부근에서 팔로군과 전투를 치렀다고 했다.

간도특설대의 성격에 대한 좀더 상세한 언급은 국내에서 출판되지 않은 <대게릴라전, 미국은 왜 졌는가>라는 책에서 볼 수 있다. 하라쇼보에서 1993년에 낸 이 책에는 ‘간도특설대의 비밀’이란 장이 있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12월 종래의 국경감시대를 해체하고 하사관을 기간요원으로 해 간도성 연길현 명월구에 편성됐다. 부대장과 중대장 일부가 일본인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한국인이었다.

백 장군이 이 부대에 배속된 것은 1943년 2월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예로부터 마적 비적이 창궐하던 지역에서 ‘무장 유민’들이 일본 세력의 진출에 저항을 했고, 그가 부임한 무렵에는 잇따른 토벌에 밀린 게릴라들이 소련령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활동이 수그러들었다. 간도특설대의 엄정한 군기는 일본군 지휘부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다. 사격·총검·검도 등의 경연대회에서 항상 우승할 정도였으니 게릴라 소탕전에서 큰 전과를 올린 것은 당연했다.

당시 상황을 기술하는 그의 마음에 갈등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는 “우리들이 쫓아다닌 게릴라 가운데 많은 조선인들이 섞여 있었다”며 “주의 주장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는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하려는 일본의 책략에 그대로 끼인 모양이 됐다”고 인정했다. 한편으로 자기변명도 잊지 않았다. “우리가 진지하게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역으로 게릴라가 되어 싸웠다고 해도 독립이 빨라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고 비판받아도 할 수 없다”는 대목이 그렇다.

차창조 광복회 사무총장은 창립대회에서 “나라가 산으로 가는지 바다로 가는지 엉망이 됐다”고 비분을 토로했다. 우리가 그 시절을 똑똑히 기억하지 않으면 국치가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김효순 대기자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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