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써가는 아힘나

"미래의 역사를 써가는 아이들이 되자"
2006년 아힘나운동본부가 한국, 일본, 재일동포 청소년과 함께 아힘나국제평화캠프를 할 때의 교육주제였다. 이 주제를 설정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일제에 의한 식민지범죄의 역사와 그 해결과정을 같은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진정한 한일평화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한일평화를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청소년들이 찾아 실천해가면서 스스로 역사를 써가는 주체가 되자는 것이었다. 

이 캠프의 의미에 동의한 일본측에서 특별강사를 섭외하였다. 그 분과의 운명적 만남으로 아힘나는 일제강점하 가장 잔혹했던 일본국가범죄였던 관동(関東)조선인학살사건을 왜곡없이 만나게 되었고, 향 후 진상규명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야까가야타에코.
당시 10세 소녀였던 야끼가야타에코씨는 2006년 아힘나국제청소년캠프에서 한국과 일본 그리고 재일동포 청소년들에게 당시 치바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을 증언해 주었다. 

"일본 군대는 치바 나라시노 수용소에서 수감되어 있던 조선인을 밤마다 5~10명씩 마치 물건을 배급하듯 자경단들에게 불하(拂下)하였단다. 자경단들은 수용소에서 끌려온 조선인 청년에게 '총으로 죽을래, 칼로 죽일까'하고 물었고, 조선인 청년은 '총으로 죽겠다'하여 결국 그렇게 살해 되었단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지. 나는 그 일을 목격한 후 얼른 도망쳐 집으로 왔지만 그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단다. 
세월이 흘러 그 날의 끔찍한 일도 잊혀져갈 무렵, 후배 교사들이 내 집에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재일조선인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고, 후배들은 자이니치(재일코리안)문제를 이야기 하길래 문득 그 엤 기억이 떠올랐단다. 다시 꿈 속에서 예의 그 조선인 청년이 꿈 속에 나타나 나에게 "말해줘! 말해줘!"하는 것 같았단다. 
나는 그 의미가 당시 그 상황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해 달라고 이해했지. 그래서 치바에서 열린 추도식에 참석해 처음으로 당시 두려웠던 그 상황을 자세히 증언하였지. 그 뒤로는 다시는 조선인 청년이 꿈 속에 나타나는 일이 사라졌단다."

캠프를 준비했던 아힘나평화학교 교사들은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과 사뭇 다른 역사이야기라고 생각했고 몇 달이 지나 다시 야끼가야타에코 선생님을 찾아가 보다 깊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것은 일본 국가가 계획하여, 군대와 경찰 그리고 자경단을 조직하게 하여 국가와 민중이 함께 조직적으로 조선인을 학살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힘나평화학교는 그 때부터 3년동안 수학여행을 일본 간토지방에서 실시하였고, 각 학살현장을 찾아가 지역 진상조사활동을 해 온 활동가들을 만나 듣기조사를 하고 자료를 모으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의 학자, 시민들과 함께 [관동조선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한일재일시민연대]를 조직하였고, 한국측 대표로 아힘나평화학교 교장(김종수)가 한국측의 대표를 맡게 되었다. 이 후 한국에서 종교인, 법조인, 연구자와 함께 [1923간토한일재일시민연대]를 조직하여 이 사건을 다양한 방법으로 이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

아힘나평화학교 역사교사인 김강산 선생은 그 뒤로 관동조선인학살을 주제로 한 석사논문을 발표하였고, 박사과정에서 제노사이드 문제를 연구하는 중에 있다. 

학살희생자를 추모하는 94주기 추도행사에 올 해도 아힘나평화학교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지난 2015년 국회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아힘나학생들은 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의 당대표였던 문재인대통령과 의원이었던 도종환문체부 장관의 전시회 축사를 똑똑히 기억하며 이번 추도행사에 국가책임을 촉구하는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다. 

 

지나 온 역사를 올바로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한 미래의 역사를 스스로 써가는 일이야말로 한 시대를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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