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여름 아힘나 일본여행기행문

광복 70년,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배우다

 

일본은 정말 가까운 나라다.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가깝다. 벌써 10번 넘게 다녀왔지만, 그때마다 매번 새로운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번 기행도 이전에 갔던 것과는 다른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일본을 다녀온 시기는 역사적으로 꽤나 중요한 시기였다. 그 때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배우러 간다는 것은 참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11일에 일본으로 출발한 우리는 후쿠오카에 들어섰다. 나와 달리 일본에 처음 가보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첫날에는 후쿠오카의 관광코스를 둘러보았다. 갔던 곳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곳은 쿠시다 신사였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자객의 칼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였다. 그 칼과 신사의 의미지가 겹치니 야스쿠니 신사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는 A급 전범들을 신으로 모시고 있고, 현재 아베는 평화헌법을 바꾸고 일본을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탈바꿈 하고 있다. 그 사람들이 일본이라는 국가에 있어서 영웅일지는 몰라도, 36년간 일제를 겪었던 우리 민족으로서는 36년간의 역사를 반성하고 있지 않은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쿠시다 신사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번 기행에서 돌아본 대부분의 유적지 등에서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둘째 날 후쿠오카를 지나 나가사키에 갔다. 많은 비로 인해 하시마로 가는 배가 운항 중지되어 셋째 날 가게 될 오카마사하루 자료관을 먼저 가게 되었다. 다른 자료관 또는 박물관과는 다르게 오카마사하루 자료관은 가해국인 일본에 의해서 피해를 받은 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자료를 볼 수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끔찍했던 것은 731부대와 난징대학살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떻게 하면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을까. 그들이 과연 사람이기는 한 것일까. 아니면 만약 내가 그 당시의 군인이었다면 상부의 명령에 맞서 이건 옳지 않은 일이라고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과연 그때의 군인들이 정말 악한 사람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고 이해조차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다만 그런 일을 지시한 일본 제국의 관리들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사람들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일본은 1945년 패망할 때 까지 조선에서 많은 것을 빼앗아갔다. 자본, 식량, 사람까지. 그렇게 나가사키로 끌려갔던 조선인들은 해방조차 맞지 못하고, 원폭에 의해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원폭은 단 두 차례 밖에 사용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위험성은 명확하게 증명되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셀 수도 없는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그 일대가 쑥대밭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차 차별은 존재했다. 일본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조선인들이 같이 피폭되었고, 길거리에서 물을 달라고 외쳤지만 조선인들에게 물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 피폭은 다행히 피했지만 강제징용으로 나가사키에 끌려온 조선인들은 나가사키로 들어가 사후처리를 강요당했다. 일본은 조선 사람을 어떻게 생각한 것인가. 과연 같은 사람으로서 생각이나 했는지 정말 많은 의문이 들었다.

하시마를 직접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멀리서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하시마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고,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관광명소가 되었지만 과연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하시마에 숨겨져 있는 지옥 같은 역사를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런 생각을 하니 안타까웠다. 이 지옥섬에서 있었던 조선인들은 지하 1000M의 막장에서 숱을 파시다가 분진폭발이나 일본인 관리들에 의해 잔인하게 돌아가셨다. 그럼에도 일본정부는 이 사실을 부인부터 먼저 하고 있고,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니 매우 원통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그런 원통함은 나가사키 전역을 돌면서 폭발했다고 볼 수 있다. 나가사키에 있는 원폭 유적지에서는 1945년 일어난 참상에 대한 안타까움이 가득하지만 정작 조선인들의 아픔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한국 사람들이 갔을 때 그들에게 위로란 것을 해줄 수 있을까? 과연 그들의 아픔이라는 것이 진정성이 있는 것일까? 남의 아픔은 가볍게 무시하면서 나의 아픔은 알아달라고 하는 이들이 과연 위로를 받을 자격이나 있는 것일까. 국가와 국민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본에서도 참 좋은 사람들이 있고, 나가사키의 원폭 피해가 얼마나 끔찍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그 이면에 감춰진 역사를 알게 된다면 어떻게 그들을 좋은 마음으로 추모할 수 있을까. 일본인들의 아픔은 공개적으로 선전하고 조선인들의 아픔은 철저히 감추고 부인하는 일본정부는 내가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의 정석이 아닐까 싶다.

나가사키를 거쳐 시모노세키에 갔을 때는 조금 힐링을 받는 시간이었다. 시모노세키 투어를 진행해주신 분은 구와노 야스오 선생님으로 거의 10년 전부터 알고 계신 분이였다. 도대체 이 아힘나라는 곳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반겨주시는지 모를 정도로 여기저기서 환대를 받았다. 시모노세키 투어를 하면서 워낙 시간이 짧아 많은 것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조선인들의 모여 살던 마을에 갔을 때 우리를 보러 온 재일조선인 1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눈물을 보이시는 모습을 보고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고작 한국사람 몇 명이 이곳을 찾아와 준 것만으로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정말 슬프게만 보였다. 우리가 그분들에게 어떤 존재일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마음을 어쩐지 알 것만 같았다.

시모노세키에서 우리를 반겨준 분들이 더 있었다. 정확히 명칭은 기억나지 않지만, 예전에 아힘나밴드가 공연을 왔었을 때 묵었던 숙소에서 진행을 하였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우리를 위해 수박과 과자와 말씀을 준비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저녁에는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집회에 참여했다. 처음에 집회라고 해서 조금 큰 규모의 거리행진을 예상했지만 거의 1인 시위와 다름없는 분위기라 조금 당황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뜻을 알릴 수 있었다. 서있으면서 한 명 한 명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대부분이 힐끗이라도 꼭 한 번씩 살펴보고 가는 것을 보고 꽤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했다.

집회가 끝나고 일본의 사회운동가 분들과 교류회를 가졌다. 사실 무언가 교류를 했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나이차나 생각의 차가 너무 많이 나서 힘들었지만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아힘나와의 인연의 끈을 이어갈 수 있게 한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아닌가 싶다.

이 쪽 기타큐슈 지역에는 참 가슴아픈 유적지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마음 아파하던 유적지가 두 곳이 있는데 바로 오다야마 묘지와 휴우가 묘지이다. 때 마침 8월 15일 광복절이 다가왔기에 더 의미있지 않았나 생각했다. 오다야마 묘지를 갔을 때 참 쓸쓸해보였다. 몇몇의 조선인들이 계속 찾아주고는 있지만, 제대로 표시도, 안내도, 비석도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오다야마 묘지는 조금의 독자적 공간이라도 있었지만, 휴우가 묘지는 더 상황이 안 좋았다. 내가 2006년 처음 휴우가 묘지를 방문했을 때 그때도 지금과 비슷하긴 했지만, 묘지공간이 조금 더 넓었던 기억이 있다.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 그 곳을 다시 방문했을 때 나는 참 놀랐다. 애완동물들의 무덤이 훨씬 많아졌고, 조선인들의 무덤은 훨씬 좁아졌다. 이제는 잘 알아볼 수도 없는 곳에 태극기 몇 개가 꽂혀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두 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이 묘지도 살아질지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 슬플 뿐이다. 그 곳에서 배동록 할아버지의 신세타령을 들으면서 정말 무언가로 가슴을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 그 신세타령을 들을 때 보다 더 늙으셨고, 힘도 없으셨지만, 나이가 먹은 지금 들었던 그 소리는 내 마음을 정말 아프게 했다. 다시는 잊지 못할 정도로. 이 휴우가 묘지에서의 아픔은 정말 잊으면 안 된다. 없어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를 갔다. ‘한국’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순간부터 민단쪽에서 지은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 이 비는 낮은 곳에서 일을 했던 조선인을 기리기 위해 근처에서 최대한 높은 곳으로 조선쪽인 서쪽을 바라보며 만들어졌다. 시간이 없어 타가와 석탄 박물관을 가지는 못했지만 하시마에서의 이야기를 통해 조선인들이 어떤 노동을 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역사 공부는 끝이 났다. 6박 7일 동안 꽤 많은 곳을 돌아다녔고, 선생님들께서 우리를 배려해서 쉬어가는 코스를 많이 넣어주셨다. 그만큼 편안한 몸으로 이 곳 저곳을 돌아다녔고, 더 많은 것을 집중해서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일본에 왔던 10번 중에서 항상 같은 느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항상 다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고, 이번 여행은 내가 살아갈 때 어떤 생각과 이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를 깨닫게 해준 여행이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이 두 말씀을 내가 어떤 일을 하든지 꼭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야겠다.

마지막으로 이 여행에서 정말 수고하신 김영순 선생님, 동산선생님, 담별선생님, 강산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김규원

아힘나평화학교 6년 (19세) 졸업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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