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학년도 연구보고서 우수작

일본 큐슈지역의 무연묘를 통해 생각하는 재일조선인의 강제노동의 역사와 앞으로의 과제

 

임수진❘2006학번•기초 1년

 

1. 들어가는 말

 

2006년 3월, 아힘나 평화학교에 입학해서 ‘재일조선인 그들은 누구인가’라는 책으로 공부를 하며 재일조선인에 대해서 배웠다.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재일조선인이라는 단어가 많이 낯설었지만 조금씩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 배워나갔다.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도 많았지만, 오랜 시간 배우면서 차츰차츰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공부를 계속 해 나가다가 아힘나 평화학교에서 2006년 6월, 재일조선인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재일동포 할아버지 할머니 인터뷰를 하기 위해 후쿠오카에 다녀왔다. 후쿠오카에 가서 재일조선인이 묻혀있는 무연묘를 찾아가 우리의 마음을 전해 드리고 왔고, 주문홍 목사님, 이누까이 목사님, 타다 목사님에게 묘지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또 재일조선인 1세, 2세 분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시간도 가졌다. 과거 재일조선인의 아픈 역사를 직접 겪으신 재일조선인 1세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니 참 생생했다. 긴 시간 동안 많은 말씀들을 해 주시는 모습을 보며, ‘그동안 가슴에 쌓이신 것(恨)이 많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으로 느낀 게 많았던 후쿠오카 여행이 끝이 나고 학교로 돌아왔다.

 

우리는 여행을 가기 전 다큐멘터리를 만들 계획을 짜고 갔기 때문에, 촬영방법․편집기술 등을 미리 배워놓았다. 우리가 직접 보고 느꼈던 그 한 순간을 영상에 담는 것은 참 소중한 일 이었다. 여행 때 촬영한 자료는 60분짜리 테이프로 25개 이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영상이었다. 어떤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만들까 라는 고민을 계속 하던 끝에, 재일조선인이 묻혀있는 묘지와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연결시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재일조선인이 묻혀있는 묘지’를 연결 지어 다큐멘터리 주제로 잡아놓았다. 다큐멘터리 기획안을 짜고, 교내 시사회를 거쳐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3개월이라는 시간에 걸쳐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다큐멘터리는 외부에 2번 상영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학교 진급 과정인 연구보고서 쓰기를 다큐멘터리와 비슷한 주제로 쓰기로 하였다. ‘재일조선인의 역사’라는 것은 너무 광범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재일조선인의 강제노동의 역사’로 바꾸었다. 연구보고서의 제목은 ‘일본 큐슈지역의 무연묘를 통해 생각하는 재일조선인의 강제노동의 역사와 앞으로의 과제’로 정했다.

 

이 연구보고서에서 일본 큐슈지역의 무연묘에 대한 설명은 6월 후쿠오카 여행에서 다녀 온 묘지들을 중점적으로 설명한 것이며, 인권․평화 운동가들에 대한 설명은 내가 만난 인권․평화 운동가들을 정리한 것이다.

 

 

2. 재일조선인의 강제노동의 역사

 

1) 재일조선인의 뜻은 무엇인가?

 

◇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강제징용 되어 끌려간 재일조선인 1세들의 후손들이 일본에서 살고 있다. (약 60만 명)

 

◇ 1945년 8월 15일, 한반도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될 당시, 일본 열도 곳곳에는 200만 명이 훨씬 넘는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 한반도 내의 전체 인구가 2,500만 명 정도였으니, 그 10분의 1에 해당하는 많은 동포가 일본에 살고 있었던 셈이다. 일본의 패전 직후, 그들은 자력으로 또는 일본을 간접 통치한 연합국 총사령부의 지시에 따른 수송 계획에 의해서 해방된 조국으로 귀환했다. 1945년 8월에서 1948년 8월까지 귀국한 조선인 수는 약 150만 명 정도이다.

 

연합국 총사령부는 “일본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일본 정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귀국을 희망하는 조선인들의 소지금액과 소지품 무게를 극도로 제한하였다. 따라서 얼마 되지는 않지만 고생하며 모은 재산을 버릴 수 없고 가족과 함께 도일해서 이미 고향에는 생활 근거가 전혀 없는 탓에 귀국하지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 본인과 그 후손이 현재의 재일 조선인인 것이다.

 

2) 재일조선인의 강제노동의 역사

 

노동력 동원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은 국내외를 합하여 700만 명이 넘는다. 그 가운데 3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일제는 1937년 7월 전쟁의 확대와 장기화에 따라 군수 물자의 보급과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서 전면적인 국가 통제와 동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1938년 4월 1일, 국가 총동원 법을 제정․공포하였는데, 이 법은 5월 5일부터 한반도에도 실시되었다.

 

일본은 이 시기의 노동력 동원의 형식을 단계별로 모집(1939년 9월~1942년 1월), 관 알선(官 斡旋, 1942년 2월~1944년 8월), 강제 징용(1944년 9월~1945년 8월)등으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 볼 때 세 단계 모두 강제력을 발동하여 조선인을 끌어가서 노동력을 수탈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 모집단계: 조선인 모집을 할당받은 석탄․광산․토건 등 사업주는 먼저 일본에서 고용 허가를 받은 다음에,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총독부가 지정하는 지역에서 사업주의 책임 아래 노동자를 모집하고 신체검사와 신원 조사, 명부 작성 등을 행한다, 또한 모집된 노무자는 고용주나 책임 있는 대리자의 인솔 아래 집단적으로 도일하여 일을 하게 된다.

 

○ 관 알선 단계: 관 알선은 더욱더 많은 조선인을 노동력으로 수급하려는 목적에서 마련되었다. 관 알선은 조선총독부가 사업주로부터 알선 신청서를 받아 각 도에 통보하면, 각 도는 부․읍․면에 할당하여 노무자를 마련하는 방식이다. 즉 총독부라는 행정 기구의 책임 아래 노무자를 마련하는 방식이다.

 

○ 강제 징용 단계: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은 1943년 말까지 약 40만 명에 달했으나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수요량을 채우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1944년 9월부터 국민징용령에 의거하여 강제 징용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조선의 젊은이는 징용 대상이 되었다. 길에서 청장년을 잡아가거나 한마음을 습격하여 마을 주민 가운데 청장년 전원을 연행하는 방식을 취하는 등 폭력적인 방법이 더욱더 기승을 부린 시기였다.

 

병력동원

 

일본은 일찍부터 조선인 노동자를 전쟁 수행을 위해 끌고 갔으나 무기를 쥐어주고 전쟁터에 보내는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했다. 일본 당국과 군부는 “조선인을 징병으로 전쟁에 내몰았을 경우, 조선인 병대가 무기를 어느 쪽으로 향할 것인가” 라고 자문하면서,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일본에게 있어서 조선인은 잠재적 소요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1937년 6월 일본 육군성은 조선군사령부에 ‘조선인 병역 문제에 대한 의견 제출’을 요구했고, 이에 대해 조선군사령부는 ‘조선인 지원병 제도에 관한 의견’을 제출했다. 여기에서 조선군사령부는 “조선인에게 황국 의식을 확실히 갖게 하고 또한 장래의 병역 문제 해결을 위한 시험적인 제도로서 조선인 장정을 지원해 의해 현역에 복무시키는 제도의 실시”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전제조건으로서 몇 가지 조항을 단서로 내걸었다.

 

첫째는 의무교육이고, 두 번째는 정신 교육이다. 일본 당국이 이 가운데 정신 교육에 비중을 두었음은 물론이다. 아울러 이러한 전제 조건이 구비되는 시점으로 설정한 시간은 50년 정도였다.

실질적인 군사력 보충을 위한 동원 방법은 징병 제도였다. 당초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실시 시기를 50년 후로 잡고 있었던 일본 군부는 병력 부족 현상을 해소할 마지막 방법으로 1942년에는 징병제 실시를 결정했다. 그러나 일본의 전선이 확대되면서 많은 병력이 필요한 상황에 직면하자 ‘향후 50년을 기약’하면서 조선인에게 국민 교육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 결과 일본은 1938년 2월 22일,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여 조선인 병력 동원을 제도적으로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지원병 제도를 통해 육군과 해군을 합하여 모두 2만 4,557명이 입대했다. 그러나 이 숫자는 매우 적은 숫자였다.

 

실질적인 군사력 보충을 위한 동원 방법은 징병제도였다. 1943년 3월 1일에 징병제 실시를 위한 병역법을 개정, 1944년 4월부터는 징병 신체검사가 실시되어 대상자의 94.2퍼센트인 20만 6천 명이 검사를 받았다. 징병제에 의해 동원된 조선인의 수는 2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준병력 동원

 

전쟁터에서 필요한 인력은 군인만이 아니었다. 각종 노무 동원력도 필요했다. 이를 위해 일본 군부는 군속이라는 명목 아래 조선인을 동원했다. 이들은 일본군이 소재한 각 전선에 투입되어 군 관할 아래 토목 건설 사업에 종사하거나, 포로 감시 요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높은 임금을 내건 모집은 농민들을 유인하기에 충분했다.

 

여성 동원

 

여성 동원은 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성노예(일본군 위안부)로 대별된다. 근로정신대는 노동 동원이고, 일본군 성노예는 성적 착취이다. 양자는 사용 용도가 달랐으므로 동원 당시부터 모집 방법도 달리했다. 여성에 대한 노동동원으로는 근로정신대 외에 종군 간호부의 경우도 포함된다.

 

근로정신대는 1944년 8월 일본에서 ‘여자근로정신령’이 공포되고, 이 법령의 조선 적용에 따라 시행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전부터 실시되었다. 선전에는 “노동 조건이 매우 좋고, 국가에 기여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학교 및 단체를 통한 동원은 담임교사나 교장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강제성이 가장 강한 방법이었다. 동원 실적을 위해서 교사가 대상 학생의 집을 방문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일본군 성노예는 강제 연행의 역사에서 가장 이른 시기부터 행해졌다. 연행 방법은 1930년대에는 위선적인 방법으로, 1940년대부터 강제로 연행했다. 군인과 군속, 경찰, 업자 등이 연행에 나섰다. 여공이나 간호보조원으로 일하게 된다는 위안소 업자의 말에 속아서 따라나선 경우가 허다했다.

 

계속되는 수탈과 학살

 

현재 중국의 아름다운 휴양 도시로 알려진 하이난(海南)섬은 구리 광산에서 수탈당하던 조선인 노동자 수천 명이 참혹하게 학살당해 묻힌 원한의 땅이다. 일본인 성노예로 끌려온 조선인 여성들의 한숨이 어린 ‘비탄의 땅’ 이기도 하다.

 

도야마에는 강제 연행된 12~16세의 소년 2,800명이 군수 공장에서 일한 것으로 판명이 되었다. 특히 8살의 조선인 소년이 홋카이도비행장 건설 공사장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다 죽었다는 최근 일본 ‘교도통신’의 기사는 일본의 잔학상을 그대로 나타낸다. 대부분의 조선인은 하루 12~14시간 동안, 마실 물조차 풍족하지 못했던 노동 현장에서 탄을 캐고 비행장을 닦아야 했다.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파놓은 땅굴에서 동물처럼 갇혀 지내야 했다. 영하의 날씨에 맨발로 작업을 해야 했고, 추위를 막을 옷도 지급되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구실로 매일 매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가는 저금통장과 겨우 생존할 정도의 음식물이었다. 게다가 일본을 위해 노동하는 조선인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일본인의 자세는 조선인에게 모욕 이상의 고통이었다.

 

“너희들 10명보다 말 1필이 더 귀하다. 알겠는가. 너희 조선인 노동자 10명보다 말 1필이 우리 대일본제국주의에 도움이 된단 말이야” 조선인을 부리던 일본인의 당당한 외침이다. 남양군도로 간 군속의 생활도 노동자와 큰 차이가 없었다. 1,600명의 동료 가운데 528명이 살아올 정도로 기아와 중노동은 가히 학살 적이었다. 배고픔과 심한 노동을 이기지 못한 조선인들이 취할 수 있는 것은 태업이나 탈주였다. 그러나 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학살에 이르는 폭력이었다. 도망간 조선인이 뒤로 손이 묶인 채 잡혀왔는데, 상반신은 벗겨지고 하반신은 반바지 차림이었다. 그는 질이 나쁜 석탄을 버리는 해안가 절벽에 던져졌다.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올라오자 다시 던져졌다. ‘아이고’라는 울음 섞인 비명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일이 아니었다.

 

 

3. 일본 큐슈지역의 무연묘와 인권․평화 운동가

 

1) 큐슈지역 무연묘

 

(1) 휴우가 묘지

 

일본인 묘지의 한 구석에 37개의 크고 작은 다양한 보타(ボタ:석탄과 함께 반출된 암석)가, 길8미터, 폭 3미터 정도의 산 표면에 있다. 비명(碑名)이나 사망 연월일 등 아무것도 표시되어있지 않다. 그러나 애완동물의 비에는 애완동물의 사망일, 이름 등이 적혀있다. 재일동포의 비는 비석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이며,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큰 돌에 불과할 뿐이다.

 

(2) 오다야마 묘지

 

1945년 9월 15일 일본에 큰 태풍이 지나갔다. 해방이 되자, 조국으로 돌아가려는 재일조선인들은 해변으로 모여들었고 배가 오자 한꺼번에 배에 탑승해서 조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는 도중 태풍을 만나 모두 사망했다. 태풍을 만나 사망한 80여명의 조선인들이 묻혀있는 곳이다.

 

(3) 여인묘

 

일명 여인묘 라고 불리는 이 묘는 지꾸호 지역에 강제연행으로 끌려와 세상을 조선인들의 무연묘라고 한다. 지꾸호는 산군일체의 침략전쟁의 기지였다. 이국의 탄광에서 고된 노동을 강요당하여 희생된 우리 선조들의 억울함이 스며있다. 뒤를 열어보면 유골을 직접 볼 수 있다.

 

(4) 조선인 탄광 순직자의 비

 

타가와시에 있는 호코지(法光寺)의 묘지에 「조선인탄광순직자의 비」가 있다. 일제식민지통치시가 일본에 강제 연행되어 탄광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려 희생된 조선인들을 공양한 위령비이다. 1975년 1월에 건립되었다. "매해 우란분 때 공양은 하고 있으나 다른 곳에서의 참배객은 없다. 가끔 수학여행이나 역사탐방으로서 조선학교 학생들이 찾아오는 정도"라고 한다.

 

 

2) 큐슈지역 인권․평화 운동가

 

  (1) 주문홍

 

- 재일대한기독교회 고꾸라교회의 목사이고, 아힘나 일본지부의 이사이다.

- 일본에서 재일동포의 삶에 접하여, 재일동포들의 인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여기게 되어서 20년 이상을 일

본에 있으면서, 평생을 일본에서 재일동포들과 더불어 그들의 인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있다.

 

 (2) 이누까이 미츠히로

- 일본기독교단 후쿠요시전도소의 목사

- 인권․평화 운동가이며, 한국인징용희생자위령비, 휴우가 묘지 등에서 사람들에게 재일조선인의 탄광노동의 역사를 알리고 있다.

 

 

  (3) 타다 레이이치

- 오다야마 묘지의 추도집회 실행위원

- 일본 기독교단 와카마츠교회 목사

 

 

(4) 오오노 세츠코

 

- 「강제연행을 생각하는 모임」의 회장

- 일본학교를 돌며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조선인 강제연행의 역사와 일본 민중들의 삶을 그림이야기(카미시바이)를 어린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4. 앞으로의 과제

 

1) 책에서 찾아본 한․일 정부의 과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재일동포는 참정권의 향유라는 측면에서 한국과 일본의 양국 정부로부터 모두 외면당했다. 한국 정부는 행정 편의의 논리를 앞세워 한국의 국적을 가진 재일동포에게 주민등록이 되어있지 않다는 이유로 선거권 행사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일본 정부는 국민 국가의 논리를 앞세워 일본 사회에 정착한 재일동포에게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지방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 가운데 한국 정부는 오로지 재일동포들의 참정권 문제를 일본 측만의 과제로 넘겨왔고, 일본의 일부 정치가들도 재일동포에 대한 참정권 부여를 반대하며 한국 정부에 먼저 참정권을 요구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재일 동포의 참정권 문제는 한국과 일본 중 어느 한 국가에 책임을 떠넘길 일이 아니며 한일 양국이 공동으로 노력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 앞으로의 바람

 

① 일본에서 우리 민족의 얼과 글을 지키고 있는 재일동포들이 있다. 그런 동포들을 위해 정부는 어떠한 지원을 해 주었을까? 우리의 얼과 글을 지키려는 재일동포들을 위해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② 1년에 한 번 또는 기간을 정해 일본에서 재일동포를 위한 행사를 여는 것이다. 전통놀이, 음식 만들기, 음식 맛보기 등 여러 가지 주제를 정해 행사를 열어, 조국이 좀 더 가까워 질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했으면 좋겠다.

③ 재일동포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거나 놀림 받는 학생들이 있다.

그런 학생들을 위해 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재일동포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에서 소외 된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물론 이 문제는 일본 정부와도 같이 협상해야겠지만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④ 민족학교를 정부에서 체계적으로 운영한다면 어떨까?

교재 등을 지원하고 학생들이 다양한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금도 대주고, 한국에 수학여행을 와서 문화를 체험하는 등 말이다.

⑤ 한․일 청소년과 재일동포(청소년)들이 모여 청소년 교류캠프를 하는 것이다. 서로의 문화, 생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재일동포 청소년들의 자신의 조국관, 현재의 삶, 앞으로의 미래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캠프를 진행하는 것이다.

서로에 대해 알아보고, 이해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통해 앞으로 미래를 이끌어나갈 청소년들에게 아주 중요하고 뜻 깊은 캠프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5. 나오는 말

 

1) 일본 큐슈지역의 무연묘를 다녀와서

 

휴우가 묘지는 미리 공부한 내용 그대로였다. 그 옆에는 탄광 노동으로 인해 돌아가신 우리의 선조 분들이 묻혀계셨다.

큼지막한 돌이 그 위에 박혀있을 뿐…….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정말 어느 곳에 묻혀계신다는 건지 알지 못할 것 같았다. 묘지라는 이름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누까이 목사님이 설명을 해 주시면 주문홍 목사님께서 통역을 해 주셨다.

 

그 곳에서 우리들은 편지를 읽었다. 그리고 우리가 준비해 온 흙을 묘지 주위에 뿌렸다. 한 줌 한 줌을 정성스레 뿌렸다. 선조 분들이 고향의 흙의 향기를 느끼실 수 있도록. 그리고서 돌 옆에 우리들이 한 마디씩 써 넣은 한반도기와 태극기를 꽂았다. 그리고 묵념…….

‘고향의 흙과 꽃을 준비해 왔습니다. 고향의 향기를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앞으로 재일 조선인의 가슴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살아갈게요. 다음에 또 올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좋겠습니다.’

 

슬픈 사연이 있는 오다야마 묘지.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마음에 얼마나 기대를 했을까? 그런데 조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돌아가시다니. 참으로 슬픈 이야기다. 오다야마 묘지에서 혜연이와 규원이가 편지를 읽었다. 그리고 그 곳에 무궁화를 꽂고, 한반도기를 꽂았다. 우리들은 할아버지, 할머니께 묵념을 드렸다.

 

아힘나 평화학교에서는 묘지에 무엇을 가져갈까 이야기를 나눈 결과, 고향의 흙을 가져가기로 해서 한지에 정성스레 담아 가져갔고, 무궁화와 진달래도 가져갔다. 그리고 한반도기와 태극기도 가져갔고, 우리의 마음을 담은 편지도 써서 묘지에서 읽었다. 주문홍 목사님, 이누까이 목사님, 타다 목사님의 안내를 받아 묘지들을 찾아가 설명을 듣고, 우리가 가져온 것들을 바치고 왔다.

 

우리가 스스로 정해서 무언가를 바치고 왔다는 것이 스스로 대견했다. 다음에 일본에 가서 무연묘들을 방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더 많은 것을 준비해 가고 싶다. 아리랑을 단소로 연습해 묘지에서 연주하고 싶고, 태극기와 무궁화, 진달래를 십자수로 만들어서 가져가고 싶다. 그리고 다 같이 학을 접어서 한군데에 모아서 가져가는 방법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외에도 많은 것들을 준비해 갈 수 있겠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우리의 마음이 담겨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2) 연구보고서를 쓰면서 느낀 점, 앞으로의 나의 다짐

 

처음에는 연구보고서를 쓰는 방법도, 써본 적도 없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어떠한 구성으로 할 것이며, 무슨 내용을 채워갈 지 또한 큰 고민이었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연구보고서 작성을 시작했다. 이번 연구보고서를 쓰기 위해 ‘재일조선인 그들은 누구인가’라는 책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연구보고서를 쓰면서 예전에 공부했던 기억들이 다시 되살아나 스스로 만족해했다.

 

내 연구보고서의 제목은 ‘일본 큐슈 지역의 무연묘를 통해 생각하는 재일조선인의 강제노동의 역사와 앞으로의 과제‘ 인데, 큐슈 지역의 무연묘는 6월 후쿠오카 여행 때 4군데를 방문하고 왔기 때문에 다른 묘지들에 비해서는 아는 것이 많았다. 그리고 각 묘지에서 목사님들이 설명을 해주셨기 때문에 더욱 기억에 남았다.

 

이번 연구보고서는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서투른 작품이 되었다. 무슨 일이던 항상 처음에는 서투른 법이니까 실망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에겐 또 다른 결심이 생겼다. 다음번에는 풍부한 자료와 나의 경험과 지식을 쌓아 연구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다음에 연구보고서를 작성할 때에는, 도서관을 찾아가 관련 문헌을 찾아보는 작업도 해볼 계획이다.

 

 

 

참고문헌

「재일조선인 그들은 누구인가」(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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