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학년도 연구보고서 우수작

재일조선인과 조선학교-우리민족은 참으로 위대하다

 

 

                                                                                 전지용❘2006학번•기초 1년

 

 

1. 들어가는 말

 

이 연구보고서를 쓰게 된 계기는 아힘나 평화학교에서 민족교육을 주제로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부터이다.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직접 일본 후쿠오카에 가서 재일동포에 대해 공부하고 인터뷰도 해보았다. 그리고 일본에서 찍은 영상을 편집하여 ‘우리 민족은 참으로 대단하다.’라는 제목의 20분짜리 단편을 만들어 보았다. 영상을 만드는 과정과 완성을 통하여 재일동포들이 겪었던 탄광노동이나 위안부, 강제징용이나 징병, 등을 알게 되었고 휴우가 묘지, 오다야마 묘지도 알 게 되었다. 재일동포들이 수난과 고난 가난 속에서 민족교육을 세우고 지켜나가는 과정을 조금 알게 되었고 다큐멘터리의 제목을 ‘우리 민족은 참으로 대단하 다.’ 라고 짓게 되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현재 조선학교의 현황까지만 나와 있고 나 또한 아직은 재일동포사회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여 이 논문을 쓰기로 하였다.

 

2. 민족교육의 역사

 

1) 재일조선인이란 무엇인가? -해방 후 일본에 남게 된 조선인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노동력을 위하여 동남아시아를 비 롯하여 우리나라의 한반도, 당시의 조선반도에서 조선인 약 70만 명을 강제연행 하였다. 그 결과로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전한 이 때 약 280만 명의 조선 인이 일본에 살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귀국하기위해 시모노세키. 하카타 등의 항구에 모여들었다. 배가 없어 서로 돈을 모아 아주 작은 어선(고기 잡는 배)을 사서 그 어선에 수십 명이 타고 가다가 배가 뒤집어져서 전부 죽어 해안가에 시체가 떠오르는 경우가 일본 곳곳에 일어났었다.

조선인의 귀국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은 소극적이었다. 1945년 9 월에 강제 연행된 노동자들을 일부 귀환시키고, 11월로 접어들어 일본을 점령했던 연합국 총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계획 수송에 착수했다. 그렇지만 본국으로 가져갈 수 있는 재산. 수하물에 대한 제한과 미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남한의 정치적 혼란 때문에 일본에서 생활 기반을 가지고 있던 약60만 명의 조선인은 일본에 남았다.

 

해방 후에도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 생활 기반이 되어 있는 조선인들을 일본에 있는 조선인이라 하여 재일(在日)조선인, 재일(在日)동포라고 부른다. 오늘날의 재일(在日)동포는 주로 이들의 자손이다.

 

2) 국어강습소 형태로 시작된 민족교육의 발자취

 

그동안 일본 각지에 있는 조선인 밀집 지역에서는 귀국·대책·실업·구제·민족적 단결 등을 내세우는 단체가 생겼고, 10월에는 전국적인 대중 조직으로 재일본조선인연맹(이하 조련)이 결성되었다. 조련의 최초 활동 중 가장 활발한 것은 귀국 운동이었다. 일본 정부도 조선인의 귀국에 관해서는 조련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인정했다. 귀국 사업과 병행하여 주력한 것은 교육사업 이었다.

 

해방 직후부터 재일조선인은 국어강습회 등의 명칭으로 서당식 교육을 하 고 있었다. 해방이 되어 귀국이 가능했지만 일본에서 자라난 조선인아이들이 한국말을 못했기 때문이다.

 

조련은 1946년경부터 귀국의 흐름이 일단락되자 각지에 있는 교육 기관을 통합해서 학교 정비를 체계적으로 진행시켰다. 1947년에는 6.3제 초.중. 고등학교와 사범학교를 마련하고 이와 함께 ‘교육규정’을 정하여 학교 운용에 관한 전국 공통 기준을 작성했다.

 

이러한 조련 계통의 학교(조선학교)는 조련이 편찬한 교과서를 쓰고 한국어나 한국 역사 지리를 중심으로 민족적 자각을 높이는 교육이 실시되었다.

 

그 당시 재일조선인의 생활은 아주 곤란했다. 일용노동자가 늘어나면서 실업·반실업자가 격증한 것도 큰 특징이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직장에서 해고당하거나 귀국을 염두에 두고 이직하여 일시적으로 무직 상태에 있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 때문에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도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 학부모가 부담하는 학비와 지역 조선인의 기부금만으로 운용하고 있던 조선학교 재정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재일조선인에 대한 당국의 정책도 엄중해졌다. 당시 가난한 재일조선인 가운데 불법 암거래나 밀주 제조에 관여하는 이도 있었다. 그들에 대한 단속이 자주 시행되면서 신문에는 조선인의 암거래 적발을 전하는 기사가 잇달아 실렸다. 또 전승국민 의식이 강했던 재일조선인과 과거의 식민 지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사람 사이에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과정에서 1946년 여름, 국회에서는 내무대신(장관)과 의원이 재일조선 인, 타이완인을 ‘제3국인’이라 부르며 범죄자로 취급하는 폭언도 있었다. 일본사회 전체에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 감정이 강해지고 있던 것이다. 또한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연합국 총사령부는 재일조선인 관리를 강화하자는 일본 정부의 의향을 받아들여 1946년 말 일본에 잔류하는 조선인을 일본 사람으로 간주한다고 공식 발 표하였다. 하지만 일본법령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1945년 말에 재일조선인의 참정권을 박탈했으며, 1947년에 공포한 ‘외국인등록령’으로 외국인 등록 을 의무화했듯이, 연합국 총사령부와 일본 정부의 재일조선인 정책은 모순적인 동시에 전체적으로 억압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일조선인의 교육 사업에 탄압이 가해졌다.

 

- 1948년 1월 조선학교 폐쇄령

GHQ(연합군(미군) 총사령부)의 지령을 받은 일본정부는 민족교육이 일본의 기본교육법이나 학교교육법에 의거하지 않다는 이유로 전국각지에서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민족학교를 강제로 폐쇄 하려고 하였다. 조련은 한일민족간의 친선을 호소하면서 일본 정부와 교섭하려고 했지만, 일본 정부는 조선인 측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학교 폐쇄를 강행했다.

 

- 1948년 4월 24일 한신 교육 투쟁

학교폐쇄령에 재일동포는 반대를 하며 투쟁을 한다. 특히 고베와 오사카에서의 투쟁은 치열했었고, 그 운동 규모가 크며 사회적 영향에 있어서 전후 최대 대중운동 이었다하여 4.24한신 교육 투쟁이라 한다. 이 때 16세 소년이 사망했다.

 

고베와 오사카에서 많은 희생자들이 나온 후에 문부성과 조련은서로 타협하여 교섭한 결과 1948년 5월 민족 교육을 인정하는 각서에 조인했다. 하지만 1948년을 전후해서 정세가 변화한다. 한반도에 분단국가가 수립되고 중국 대륙에서는 공산당이 우위를 차지하면서 동아시아의 냉전 구조가 심화하자, 미국의 일본 점령 정책도 반동화되었다. 연합국 총사령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을 지지하는 조련을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연결된 단체로 간주하고 경계를 강화했다.

 

그리고 1949년 9월 일본 정부 법무부는 조련 및 그 산하에 있는 재일본조선민주청년동맹의 전 조직, 민단. 건청의 일부지부에 대해서, 4월에 공포한 ‘단체 등 규제령’으로 해산시켰다. 조련 해산에 이어 1949년 10월에는 제2차 조선학교폐쇄령이 강행되었다. 문부성이 연합국 총사령부와 협의를 거친 후 통달을 내리고, 전국 약350개의 조선학교를 폐쇄하고 사립학교로 개편할 것을 명령했던 것이다.

 

이 제2차 조선학교폐쇄령은 조련을 해산시킨 이후에 시행되었기 때문에 각지의 조선인은 전국적인 통일 운동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학교가 있는 지역마다 지방자치제와 개별적으로 교섭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조선학교가 실시하던 교육은 크게 세 가지 길을 걷게 되었다.

 

첫째는 조선학교가 폐쇄된 결과 조선학교 학생이 일본 공립학교에 입학한 경우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거나 장기간 결석으로 인한 불취학 아동이 증가했다.

 

둘째는 조선학교가 일본 공립학교로 그대로 전환한 것이다. 이 경우 일본교육 과정이 적용되는 한편 일본인 교사가 들어왔다. 그러나 조선인 교원과 학생이 학교 운용의 실질적 중심이 되어 민족 교육을 유지하려고 힘썼다.

도쿄도립 조선학교가 이와 같은 예에 속하는데, 행정 당국은 조선인 교원 의 활동을 규제하고 1951년에는 공산주의 운동과 관련이 있다는 명목으로 경찰관 500명이 교내를 수사함으로써 공립학교에서의 민족 교육을 억압하려 했다.

 

셋째는 폐쇄조치에 끝까지 반대해서 자주 학교로 존속한 사례다. 이 경우 민족 교육은 지킬 수 있었지만 학교 운용에는 재정적 어려움이 동반되었다.

 

1949년의 제2차 조선학교폐쇄령 이후 세 가지 유형으로 갈라진 조선학교는 각각 고난의 길을 걸었다. 민족학교에 다니는 학생 수도 부쩍 줄어들었다. 그 당시 ‘도지 라인(Dodge line)’이라고 불리는 초긴축 정책이 실시되어 재일조선인 사회 전체가 큰 타격을 입고 있었다. 재일조선인이 경영하는 중소기업이 잇달아 도산. 전업하였으며, 생활 보호를 받는 재일조선인은 무려 7만 가구에 달했다. 이 때문에 각지에서 일자리 확보, 임금 인상, 생활 보호 등을 요구하는 생활권 옹호 투쟁이 일어났다. 고베에서는 1950년 생활권 옹호를 호소하는 조선인 2천 명이 경찰과 충돌한 사건도 일어났다. 그러한 가운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좌파 계통의 조선인은 전쟁 발발 직후부터 북한 옹호를 위한 행동부대로 각지에서 비합법적으로 조국방위위원회(이하 조방위)를 조직했다.

 

조방위는 청년을 중심으로 주요 도시에서 삐라를 뿌리고 무기 제조와 수송을 막으려 했다. 1951년 말부터 다음해 전반에 걸쳐 일본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극좌 모험주의적인 실력 투쟁이 잇달았고, 화염병을 던지는 조선인·일본공산당원과 경찰관이 각지에서 충돌했다. 조련 해산 이후 조직 재건에 노력해 온 활동가들은1951년 1월 재일본조선통일민주전선(이하 민전)을 결성하고 조방위와 함께 반미 반전을 외쳤다. 민전은 반공의 입장을 취하는 민단. 건청 에서도 참가자가 있었을 만큼 폭 넓은 민족 통일 전선을 지향하고 있었다. 다만 민전 내부에는 재일조선인이 일본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것에 대해 의견 대립이 생기고 있었고, 이것이 전쟁 후의 노선 전환으로 이어졌다.

 

한편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에 지원병을 보내는 문제를 두고 민단. 건 청 내부에서는 찬반 논쟁이 일어났다. 또 민단과 주일 한국 공사 사이의 대립으로 내부 혼란이 계속됐다.

 

1950년대에는 민단 계통의 교육 기과니 도쿄·오사카·교토에 개설되었는데 오늘날까지 그 이상 확대되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의 재일조선인 정책과 재일조선인 운동 자체는 한국전쟁 종결을 전후하여 크게 변화했다. 한국 전쟁 중인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이 독립을 회복함에 따라,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를 ‘일본인’으로부터 ‘외국인’으로 일방적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외국인의 출입국 및 강제 송환에 관한 법규로 1951년 출입국관리령(이후 출입국관리법)을 공포했다. 또 1952년 외국인등록법이 공포되어 재일조선인을 포함하는 외국인에게 지문 날인을 강요했고, 14세 이상은 외국인 등록증을 늘 휴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외국인 등록법은 그 후 개정됐지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재일조선인 운동도 크게 전환했다. 1954년 남일 분한 외상이 재일조선인을 북한 재외 공민으로 인정하도록 일본정부에 항의 성명을 보냈다. 재일조선인 운동을 일본공산당이 지도하는 것도 부정되어다. 이 남일 성명에 따라 1955년 민전은 해산하고 한덕수 등을 지도부로 삼는 재일본조선인연합회(이하 총련)가 결성됐다.

 

총련은 일본의 내정 불간섭이라는 원칙에 따라 북한 재외 공민의 입장에서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러한 정세는 조선학교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인이 외국인으로 간주됨에 따라 문부성은 1953년 조선인 학생은 의무 교육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조선인 학생을 일본 공교육 체제 내에 편입하려는 종래 정책은 이제 그들을 축출하려는 정책으로 180도 전환되었던 것이었다.

 

도쿄에서는 조선인 교원. 학부모, 일본인 교원. 지식인 들이 반대 운동을 벌였음에도, 1955년 공립 조선학교가 폐교되어 자주학교가 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공립 조선학교는 자주학교가 되어 지방자치체로부터 각종학교로 인가받았다. 이러한 상황에 있었던 조선학교를 다시 일으키는 데 조직적 기반이 된 것이 총련이었다.

 

총련은 1956년 ‘학교 규정’을 정하고 전국에 있는 조선학교를 통일적으 로 관할하였다. 또 1957년부터는 북한이 교육 원조비와 장학금을 제공하기 시작함으로써 조선학교는 궁색한 운영 상화에 일단 종지부를 찍었다.

 

전국적으로 조선학교 교사가 목조에서 철근 건물로 바뀐 것도 같은 시기였다. 1956년에 조선대학교가 도쿄에 세워지고 1959년부터 북한 귀환 운동이 시작된 것도 민족 교육에 대한 열의를 높였다.

 

이렇게 해서 조선학교에 역사에서 1950년대 후반 이후 몇 년 동안은 해방 직후에 버금가는 두 번째 고양기가 됐다. 한편 이런 총련·북한과의 관계는 학생의 교육 내용이나 교원 지도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조선학교에서 교육하는 중에 북한 지도자인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학습하는 것이 차차 중시되기에 이르렀다.

 

북한에 의해서 재정적. 사상적으로 강한 영향을 받으면서 일본 사회 내에서 각종학교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오늘날 조선학교의 모습은 1950년대에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그 후 조선학교의 학생 수 증가는 둔화되어 4만 명 정도에 그쳤다. 학생 수는 1980년에는 약 3만 1천 명, 1993년에는 약 1만 8천 명으로 감소하고 있다.

 

그 이유를 몇 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각종학교인 조선학교는 일본인 학교에 비해 교육 조건이 뒤떨어진다. 공립이 아니기 때문에 학부모 부담이 큰 것, 졸업생에게 일본 대학 입시를 치를 자격이 없는 것 (이것은 요즘 들어 개선되고 있다.) 등이다.

 

둘째,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정주(定住). 귀화 지향이 강해지고, 또 일본인 사회와 마찬가지로 출생률 저하로 인해 취학 아동 총수가 감소하는 등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다.

 

셋째, 앞에서 언급한 사상 교육이 재일. 한국 조선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조선학교의 발전을 막아버렸다고 지적하는 의견이 있다. 한국이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루면서 일본에서의 평가가 높아진 데 반비례하여,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강해졌던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재일조선인 취학 아동 중 조선학교에 다니는 사람의 비율은 10퍼센트까지 떨어졌다. 대부분의 아동은 일본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각 지방자치체가 작성한 재일외국인에 대한 방침에 따라 공립학교에서도 어느 정도 다문화 공생 교육이 실시되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조선학교가 민족 교육을 전면적으로 맡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런 가운데 조선학교에도 1993년 교과서를 개정하고 일본에 사는 재일조선인에 알맞은 교육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1995년에 일어난 한신(阪神) 대지진때 피해 지역에 있던 조선학교가 일본인 주민에게 피난소로 개방되면서, 동네 주민과 교류하는 계기가 된 것도 변화의 한 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해방 후 반세기 동안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을 지켜왔던 조선학교는 지금 전환의 기로에 서 있다.

 

 

3. 민족교육의 현황

 

1) 민족교육의 세 가지 형태

 

민족교육은 크게 조선학교, 한국학교, 민족(방과 후)학급, 이렇게 세 가 지의 형태로 구분이 된다.

(1) 조선학교

 

조선학교란 조총련계의 학교를 일컫는 말이다. 1957년부터 북한이 교육 원조비와 장학금을 제공하였다. 북의 영향이 크다. 조총련 산하에는 1개 대학, 12개 고교, 54개중학교, 80개소학교와 3개 유치원이 있다.(04년도)

 

(2) 한국학교

 

한국학교란 민단계의 학교를 일컫는 말이다. 민단은 4개 고교, 4개 중학교, 3개 소학교, 2개 유치원에 이외 한국어강좌를 하는 학원이 7개, 종합교육원이 14개가 있다.(04년도)

 

(3) 민족학급

 

민족 학급이란 일본학교에 다니는 동포 자녀를 위하여 학교 안에서 「민족학급」이나 「국제학급」이란 명칭으로 과외수업을 하고 있는 교육이다. 동포가 많이 거주하고 있는 관서지방 특히 오사카(大阪)지방에 많다.

 

 

2) 조선학교의 현황

 

(1) 에다가와 학교를 통해 볼 수 있는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

 

1936년 IOC총회에서 1940년 도쿄올림픽을 개최하기로 결정하면서 도쿄 도는 시오자키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들을 이미 매립해 둔 에다가와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기로 한다. 도쿄올림픽은 중일 전쟁의 격화로 인해 중지되었으나 이주 계획은 예정대로 계속되어 1941년 7월 에다가와에 230호의 간이주택을 세워 1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강제 이주 하게 된다.

 

에다가와는 비가 내릴 때마다 토지가 침수되고 공동화장실의 오수도 길가에 흘러넘치는 상황이었으며 쓰레기 소각장과 소독장이 인접하고 있었으므로 파리가 모여들고 악취가 나는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다. 관리자였던 도쿄도는 행정상 당연히 해야 할 관리업무를 일체 포기, 재일조선인들이 자력으로 주택 환경을 개선해 왔으며 학교 또한 스스로 일구어냈다.

 

1955년부터 학교 측은 토지를 일부는 유상으로 일부는 무상으로 빌렸으 며 1960년 이후에는 유상으로 빌렸다.

 

1971년 학교는 당시 도쿄도 지사인 미노베에게 에다가와 학교의 역사적 경위와 학교재정의 어려움 특히 민족교육에 국고보조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학교토지의 사용료를 무기한 무상으로 임대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도쿄도는 이를 승낙하였다.

 

1972년 4월에 학교가 임대료를 지불할 수 없게 된 시점인 1970년부터 20 년 동안 학교 토지를 무상으로 빌려주는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 계약에는 기간 만료 시에 `계속 사용할 필요가 있을 경우 협의. 선처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1990년에 그 계약기간이 종료된 후에도 도쿄도는 학교와 교섭을 계속해왔고 도쿄도는 에다가와 학교에 국고보조도 없고, 땅 임대료도 받지 않은 상태로 협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9년 4월에 취임해 2003년에 연임에 성공한 이시하라 신타로 지사는 2003년 12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에다가와 학교가 도유지(都有地) 위에 서있다고 교사의 일부를 헐어서 퇴거할 것, 그동안의 지대 상당금으로서 4억엔이나 되는 막대한 돈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며 재판을 걸었다.

 

에다가와 민족학교 문제를 얘기한다고 했는데 저희가 아힘나 운동본부 김종수상임이사를 연결했어요. 에다가와 민족학교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 최근 재일동포사회에서 일본이 우경화됨에 따라 여러 가지 아픔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하나는 우토로 문제이고 또 하나가 에다가와 학교 문제였습니다. 아힘나 운동본부는 일본에도 지부를 설립하고

활동하고 있는데 이번 여름 일본지부 창립행사 준비 차 동포사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도쿄도에 있는 에다가와 학교를 방문했고 송현진 교장선생님을 만나 이 학교가 겪고 있는 안타까운 사정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또한 학교시설도 돌아보았는데 벽에 금이 가고 곳곳에 비가 오면 물이 새기도 하여 양동이로 받쳐놓은

모습을 볼 수 있었고, 학교재정이 부족해 운동장의 일부를 주차장으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에다가와의 우리 동포들은 이 학교를 살려가기 위하여 학교가 곧 조국이라는 생각으로 그야말로 학교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동포들의 도움이 정말 필요하겠다 싶어 이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 에다가와 민족학교 재판투쟁을 지원해나가는 모금운동을 펼치고 계신데.... 일본에 있는 민족학교에 대해 설명을 해 주셔야 할 것 같아요?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후 혼란의 극치에 있었던 일본사회 속에서 재일동포들은 귀국을 위한 기회와 수단을 모색하면서 생활과 민족교육을 지키는 길을 필사적으로 찾았습니다.

우리 동포들은 일본 각지에서 ‘국어강습소'를 개설하여 아이들에게 우리말교육을 실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식민지시대에 빼앗긴 민족의 말과 글, 문화와 역사를 되찾자’, 는 재일동포들의 굳은 결심으로 민족학교들이 일본 방방곡곡에 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1948년 이후 민족학교의 폐쇄, 배제와 방치라는 탄압을 되풀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넋을 잃지 않고 살고 싶다는 아이들의 뜨거운 마음과 부모들, 교원들을 비롯한 우리 동포들 모두의 뜨거운 마음에 의해 민족학교는 꿋꿋이 명맥을 이어왔으며 오늘 날 일본전역에 약 90개의 초, 중, 고등학교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 현재 일본 전역에 민족학교들이 얼마나 있는지

 

약 90교의 조선학교와 4개의 한국학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학교 내에 민족학급 또는 국제학급이란 이름으로 200개의 학급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 에다가와 학교는 90여개 되는 민족학교중의 하나인데 에다가와 학교를 소개해 주신다면?

 

도쿄지역에는 우리 동포들이 다수 살고 있습니다. 에다가와 학교는 도쿄도 코우토구에 있는 ‘도꾜조선제2초급학교’입니다.

- 60여명의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학교용지로 쓰이고 있는 토지에 대해 일본 지방자치단체가 내놓으라고 하는

 

1940년에 개최예정이었던 '올림픽'의 회장확보를 '구실'로 도쿄도는 재일동포들을, 매립을 끝낸 지 얼마 안 된 황폐화된 땅이었던 에다가와에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이유는 뭔가요?

도쿄도는 이러한 역사적 경위를 고려하여 1972년에 (현재 학교가 서있는) 토지를 학교용지로 사용할 수 있도록 20년간의 무상대여계약을 맺었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에 그 계약기간이 일단 종료된 후에도 도쿄도는 학교와 교섭을 계속하여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3년 12월, 도쿄도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에다가와 학교가  도유지(都有地) 위에 서있다고 하여 교사의 일부를 헐어서 퇴거할 것, 그동안의 지대상당금으로서 4억엔이나 되는 막대한 돈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며 재판을 걸었던 것입니다.

 

이는 도쿄도의 반인권적이고 참으로 국수주의적인 정책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재일동포들에 대한 탄압정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2003년 12월 이후 현재까지 상황이 어떻게 전개돼 오고 있는지

 

도쿄도의 반인권적인 정책에 반대하는 우리 동포들뿐만 아니라 양심적인 일본사람들도 함께 에다가와 학교를 지키기 위한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에다가와 학교 문제를, 일본에서 민족적 마이너리티들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그들의 민족교육권을 확립하기 위한 투쟁으로 여기고, “에다가와 기금”이란 이름으로 시민

 

단체를 조직하고 에다가와 학교를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

 

- 에다가와 민족학교를 지키기 위해 힘을 모으는 것은 단지 학교만을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 아닐까 싶어요? 앞으로 어떻게 이 운동을 이어가실 계획인지...

 

아힘나 운동본부에서는, 에다가와 민족학교 지원운동을 통해, 과거의 재일동포들의 삶과 현재 그들이 처한 현실을 한국에 알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타인의 역사가 아니라 다름 아닌 우리 한국의 역사이고 우리 한국 사람들의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나라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에다가와 민족학교를 지원하는 운동을 통해, 민족적 마이너리티들의 인권문제, 그 속에서도 특히 그들의 민족교육권 확립에 관한 문제를 부각시키고, 재일동포들을 비롯한 일본 내 소수자들의 인권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나서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힘나 운동은 평화운동이며 인권운동인 것입니다.

자료 1 - CBS 라디오 방송 아힘나 운동본부 김종수 상임이사의 인터뷰 중

자료 2 - 한일시평 제47호

한일시평 제47호 (2005년 2월 23일)

 

  재일동포 민족교육의 어려운 현실

 

  최영호 (영산대학교 국제학부)

 

  재일동포 3세 이하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전반적인 출산율 저하와 함께 자연 감소하고 있는데다가 대다수가 일본 국적을 선택하면서 민족적인 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가운데 일본의 민족교육 기관은 그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요즈음 졸업과 입학 시즌을 맞아 일부 학교에서는 졸업생들의 사회 및 상급학교 진출 결과를 내보이거나 교육내용을 소개함으로써 학생 유치를 위한 홍보에 노력하고 있다.

교육의 침체를 만회하기 위해서 오사카의 금강(金剛)학원은 교직원 전원이 작년 초부터 지역 내 하급 학교를 방문하여 새롭게 바뀐 국제화 교육 내용을 설명하며 학생 모집에 노력한 결과, 올해는 입학 정원을 거의 채울 수 있는 만큼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또한 교토 국제학원의 고등학교는 외국어를 보강한 국제화 교육과 함께 학생들이 선호하는 야구부 육성을 특성화하여 지난 90년대 이래 침체 일로에 빠져 있던 등록율을 올해 대폭적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民團新聞 2월 16일자) 일본에서 불고 있는 한류 열풍도 이들 민족교육 기관의 회생에 좋은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는 듯 하다. 이들 민단계 교육기관이 올해 거두고 있는 성과를 유지 확대하기 위해서는 공통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국제화 교육이 그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인내를 가지고 끊임없이 자구 노력을 쏟아야 한다.

  그런데 재일동포 민족기관 가운데 총련계 민족교육 기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려운 현실에 봉착하고 있다. 현재 총련에서는 실상을 알리고 있지 않아서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곤란하지만 학생 수가 점차 감소하고 있어서 학교 운영이 파행화 되고 있으며 학교가 통폐합되는 일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북한에 대한 일본사회의 적대적인 분위기는 학생 모집을 어렵게 하고 있는 가운데 민족교육기관들이 북한식 교육에서 탈피하려는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총련의 지시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교육기관으로서는 내외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으며 자녀들에게 민족교육을 시키고자 하는 학부모로서는 학교 선택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은 민족교육의 현실과 장래에 관하여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사이트에, 고민 끝에 민족학교(‘우리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킨 학부모의 심경과 그에 대한 다른 교육자의 반응이 잘 나타나 있어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韓ドラ仲間‘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학부모가 ’고뇌에 찬 선택‘ 이라는 타이틀로 올린 글과 ’學父OB‘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옛 민족교사가 답글로 올린 것 가운데 그 일부를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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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2월 19일) 며칠 전 막판까지 고민하던 끝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우리학교 신입생 설명회에 막내 아이와 다녀왔습니다. 솔직히 말해 1학년 신입생이 되는 우리 아이의 진로에 대해 이 정도로 고민할 줄은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위 아이들 때에는 망설이기는커녕 당연하듯이 우리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 때는 아직 납치사건 이전이었고 부모로서는 우리학교가 배척을 당하는 가운데에서도 아이들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신념이 있어서 희미하게나마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눈이 뒤집힌 총련 중앙조직의 영향으로부터 빠져나오기 힘든 우리학교의 실태를 보면 아이를 보내기 싫습니다. 그렇지만 우리학교가 1세 어른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이며 동포들의 갖가지 생각들이 담긴 재일 코리안의 보물이라는 점이 아무래도 저의 뇌리에서 떨쳐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여러 가지 선택지 가운데 마이너스 측면도 모두 고려하면서 굳이 우리학교를 선택한 것은 우선 우리말을 배우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막내 아이가 어제 TV에 방영되는 김정일 탄생 축하 퍼레이드 모습과 핵무기에 대한 폭탄발언에 대해 어린아이 나름대로 소박한 의문을 던졌습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조마조마하고 두근두근했습니다만 사실은 객관적으로 대답하려고 합니다. 점점 더 복잡해질 질문에 대해 학교에서의 교육과 위화감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며 대답하려고 합니다. 아무튼 이제부터 어떻게 될지 지켜보려고 합니다. 우리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고 계신 여러분은 어떻게 대처하시고 계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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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 (2월 20일) 당신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학교를 선택한 이상 아이에게는 나이에 맞추어서 진실을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학교에서도 가르치고 있는 것이 모두 올바른 것은 아닙니다. 불충분한 부분을 가정교육에서 보충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아이들은 이미 졸업을 했습니다만 지금도 기회 있을 때마다 논의합니다.

 

  저는 예전에 교사 일을 했습니다. 당시는 너무나도 정보가 없어서 판단 재료가 부족했습니다. 또한 미디어에서도  지금처럼 실시간으로 공화국(북한)의 모습을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모순이 없지는 않았습니다만 공화국 문제는 학생들과의 사이에서 애매한 상태로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그러한 애매함을 씻고 교사로서도 눈을 감거나 귀를 닫기에 곤란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교사로서는 선택을 강요받게 된 것입니다.

 

  교육자로서의 신념은 각각 다르기 때문에 현 재직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선대학교를 정년퇴임한 은사님께서 대학 동창회에서 양심을 가지고 ‘사죄’하는 광경도 있었고 초중등 교사와 졸업생과의 사이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교육자로서의 양심이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퇴직하고 나서 손바닥을 뒤엎는 것처럼 反공화국 反총련으로 바뀌는 교사나 총련 임원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왠지 충실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 현직에서 진실을 가르치라고 요구하는 일은 가혹한 이야기이며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느끼는 모순은 부모로서 분명하게 풀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민족학교를 동포의 피와 땀의 결정체, 재일 코리안의 보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학교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경험을 가진 동포 뿐인지도 모르겠군요.

 

(2) 현재 조선학교가 가지고 있는 어려움과 문제점

 

자료 4 - 한일시평 제61호

한일시평 제61호 (2005년 5월 25일)

 

조총련 결성 50주년과 민족교육

 

최영호 (영산대학교)

 

조총련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은 금년 5월 25일로 조직 결성 50주년을 맞는다.

 

이를 기념하여 중앙본부는 민족학교로서 유서 깊은 東京朝鮮中高級학교에서 오는 29일 성대한 축제를 열어 다양한 공연과 시합을 가질 예정이며 각 지방조직에서도 25일을 전후하여 동포들을 위한 갖가지 기념행사를 펼치고 있다. 이와 함께 조총련 중앙본부는 24일 낮에 중앙 및 지방 조직의 간부 2천 명 가량이 참석한 가운데 50주년 기념 중앙대회를 개최했으며 저녁에는 내빈으로 일본의 각 정당 간부와 각국 주일대사 등을 초청하여 기념 파티를 열었다.

 

고이즈미는 작년 5월에 자민당 총재의 자격이기는 하지만 일본 수상으로서는 처음으로 조총련 제20회 전체대회에 축하메시지를 전달한 바 있다. 그때 그는 두 번째로 평양에 다녀 온 직후로 메시지를 통해 북일관계의 개선에 대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할 정도로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였다. 그러나 올해는 작년에 비하면 험악하다고 표현할 만큼 북일관계가 경색되어 있다. 납치된 일본인의 유골이라고 하며 북한측이 보낸 유골이 가짜로 판명된 것을 계기로 북일 교섭이 중단된 상태이며 북한의 핵개발문제로 일본내 여론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고이즈미가 과연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조총련에 대해 축하 메시지를 전달할 것인지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파티에 직접 참석하지 않는 대신에 자민당 부간사장 佐田玄一郞을 참석시켜 메시지를 대독하게 했다. 보도에 따르면 축하메시지로는 걸맞지 않는 북한을 추궁하는 표현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북한이 납치문제에 성의 있는 대응이 보이지 않고 있으며 6자회담이 재개되지 않는 사이에 핵무기 보유를 표명하는 등 국제사회 전체에 우려를 낳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또한 현안 문제를 해결하고 국교정상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대화 재개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하며 조총련에서도 할 수 있는 한 이에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Sankei Web, 05/24 23:17)

 

일본 사회에 북한 혐오 분위기가 확산되고 재일동포들이 대거 ‘조선적’에서 이탈하고 있는 가운데 조총련은 조직의 생존 유지에 위협을 받고 있다. 이는 여전히 북한의 폐쇄적인 정치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조총련이 1959년부터 조직을 들어 ‘귀국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9만 명이 넘는 재일동포 가족을 북한으로 보낸 일은 역사적 오점으로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피해자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다만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가운데에도 조총련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재일동포의 권익옹호 기관으로서 활동하면서 민족교육을 적극 지원해 온 과거의 업적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일본사회에 민족차별이 존재하는 가운데 재일동포 학부모들이 그런 대로 민족교육에 대한 욕구를 충족할 수 있었던 것은 조총련과 같은 민족단체가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교육사업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최근 발행된 잡지에 조총련의 조직적인 관여와 지원을 중심으로 재일동포 민족교육의 큰 흐름과 오늘날의 어려움과 이를 극복하려는 미시적인 움직임을 정리한 바 있다. 이 논문의 결론 부분을 아래에 인용한다. (‘조총련에 의한 민족교육의 어제와 오늘’, “황해문화”, 2005년 여름호)

 

전후 일본으로부터의 사회적 제도적 차별 가운데 민족교육은 재일동포들의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유지 계승하게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따라서 대부분의 민족단체들은 충분하지 않은 재정 가운데에도 동포들의 민족적 재산이라는 사명감으로 민족학교를 세우고 유지 운영해 오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재일동포 3세 이하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전반적인 출산율 저하와 함께 자연 감소하고 있는데다가 대다수가 일본 국적을 선택하면서 민족적인 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재일동포 민족교육 기관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재일동포 민족교육의 변화 움직임을 크게 보면 탈(脫)이념화, 초(超)민족화 움직임으로 요약할 수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남북한 정치상황에 따른 정치이념이 점차 민족교육의 장에서 퇴색되고 있으며 재일동포 사회의 교육적 수요에 맞추어 점차 인터내셔널스쿨 형태로의 변화를 통해 민족교육의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 일부 조총련계 인사 가운데에도 민족학교의 유지를 위해 한국이나 해외 동포와의 적극적인 교류, 영어와 중국어 등의 외국어 교육 특성화를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변화의 실태와 필요성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조총련계 민족학교가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생존해 가기 위해서는 시대의 변화를 직시하고 민단계 민족학교의 노력을 본받아 스스로 국제화 교육기관으로 거듭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한 오늘날 지역단위 레벨에서 조총련계 동포들이 문화행사에 있어서 민단계 동포들과 합동으로 행사를 주최하는 경우가 일반화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동포들 간에 확산되고 있는 정치이념을 초월한 화합 움직임을 민족교육의 생존 및 활성화를 위한 에너지로 승화시켜가야 한다.

 

한국의 정부와 교육계 시민단체도 재일동포 민족교육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단기적으로 한국의 청소년들을 선발하여 재일동포 민족학교의 교사로 봉사하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제안하고 싶다. 장기적으로는 남북한의 정부와 재일동포 민족단체가 공동으로 민족교육의 발전을 위한 청사진을 마련해야 한다. 오늘날 조총련계 민족학교 어린이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어린이나 교사들과 친숙한 관계를 맺고 있는 실정에 비추어, 한국의 학교들이 재일동포 민족학교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실시해 나가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본다.

 

 

 

 

4. 앞으로의 조선학교

 

1) 조선학교가 바뀌어야 할 점

 

현재의 민족교육은 학생 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많이 약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재일동포 학부모는 자식을 조선학교에 보낼지 말지 많은 고민 끝에 결정하고, 재일동포 3,4세 들은 일본 정주, 귀화 경향이 강해지면서 재일동포 4,5세들은 민족(조선)학교를 가지 않고 대다수가 일본학교로 등교한다. 일본에서 대북관계가 나빠질수록 조선학교도 긴장을 해야 한다. 에다가와 학교처럼 민족적 차별이 가해지기도 한다.

 

결국 조총련에서는 지금의 죽어가는 민족교육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 현황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무언가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현재 일본에 있는 수많은 민족학교는 거의 조총련의 산하에 있다. 그러므로 조총련에서는 민족학교를 거의 전담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민족교육의 기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조총련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조총련이라는 민족교육 기관이 앞서 자료에 나와 있듯 탈(脫)이념화, 초(超)민족화 움직임을 통하여 민족교육의 생존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난 6월 후쿠오카의 조선학교를 몇 곳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우 리말을 배우는 아이들이 자랑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북의 주체사상의 틀 안에서 자라나는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신고 있던 양말은 북한의 국기가 그려져 있었고, 북한식의 문장 등 북의 영향이 강하였다.

 

민족교육은 북의 주체사상을 배우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민족교육은 앞으로 태어날 재일동포 6,7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서 우리말과 문화를 학습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자료에 의하면 자식을 조총련 산하의 민족학교에 보내기를 고민하는 학부모가 ‘솔직히 눈이 뒤집힌 총련 중앙조직의 영향으로부터 빠져나오기 힘든 우리학교의 실태를 보면 아이를 보내기 싫습니다.’ ‘제가 여러 가지 선택지 가운데 마이너스 측면도 모두 고려하면서 굳이 우리학교를 선택한 것은 우선 우리말을 배우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재일동포사회가 조총련과 민단이라는 갈라진 민족교육기관에 의한 민족교 육, 북한, 남한에 대해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쳤다’ 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문화를 배울 수 있는 학교는 조선학교밖에 없으므로 조선학교에 자식을 보낸다는 것, 이것은 민족교육의 문제만이 아니라 재일동포사회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 다. 탈(脫)이념화 , 초(超)민족화 이 두 가지가 재일동포사회의 미래라고 생각된다. 이것을 위해 조총련에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2) 조선학교에 대한 바람

 

조총련에서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점은 탈(脫)이념화 , 초(超)민족화를 통하여 스스로 국제화 교육기관으로 거듭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조총련이 민단과 화해하고 학부모, 지식인, 교사, 학생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변화의 계기를 잡아 북한과 한국의 정부에게 협력할 것을 요청하고 학부모, 지식인, 교사, 학생들의 목소리로 민족학교가 새롭게 거듭하여 재일동포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자신들의 이점을 살려서 재일. 한국. 일본의 청소년들이 교류할 수 있는 프 로그램을 만들어 민족학교에 일본과 한국청소년들이 관심을 가지도록 해야 하며, 이를 계기로 국제화 교육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총련은 변화의 계기를 잡아 해방 후 지금까지 지켜온 민족교육을 앞으로 도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총련이 탈(脫)이념화, 초(超)민족화를 통하여 스스로 국제화 교육기관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5. 나오는 말 -보고서를 쓰면서 느낀 점-

 

내가 재일동포와 민족학교를 주제로 삼아 이 연구보고서를 쓰면서 여러 가 지 느낀 점이 많다. 우선은 처음 쓰는 연구보고서라서 많이 서툴고 또한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이 주제에 대해 완벽히 이해를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시간도 잘 활용하지 못하여 이렇게 보고서를 끝내니 아쉽다. 어쩔 때는 Ctrl+c와 v로만 채운 것이 아닌가 하며 나의 무지와 해이해진 정신을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재일동포라는 주제가 이해는 되지만 아직 내가 해결방안을 내놓을 만한 지 식은 없는 것 같다. 그냥 내가 이 주제에 대해 조금 이해하고, 이해한 점에 대해서 생각한 것을 써놓았다고 할 수 있다.

 

이 보고서를 쓰기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지식을 얻어서, 비록 보고서는 잘 마무리 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배우는 즐거움에 기쁘기도 하였다.

 

나는 재일동포사회를 배우면서 통일에 대한 절실함을 느꼈다. 그동안 알고 있던 민족교육과 보고서를 쓰면서 알게 된 내용이 나에게 통일의 필요성을 깨우쳐주었다. 물론 재일동포사회만으로 통일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큰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민단과 조총련으로 나누어진 이 때 많은 재일동포들은 아이를 학교에 보낼 지 말지 고민을 한다. 앞서 민족교육의 역사에 나와 있는 문장 중에서 ‘1990 년대에 접어들면서 재일조선인 취학 아동 중 조선학교에 다니는 사람의 비율은 10퍼센트까지 떨어졌다. 대부분의 아동은 일본학교에 다니고 있다.’ 라는 문장이 있다.

 

위의 자료 속의 학부모의 고민내용을 보아도 그렇다. 현재 재일동포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다. 나는 이러한 상황에 처해있는 재일동포사회를 보면서 ‘만약 한반도가 분단되어 있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에 처하지 않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재일동포사회는 통일의 필요성을 깨우쳐 주었다. 그리고 또한 이 시점에서 재일동포사회에는 탈(脫)이념화 , 초(超)민족화, 이 두 가지가 절실하다고 느껴졌다.

 

지난 11월 10일 “한신대학교-조선대학교 동문초청 심포지엄” 때 유태성선생 님이 발표하신 코리어국제학원에 대해 잘 이해가 안 되었지만, 이 보고서를 쓰고 난 지금 이해가 조금씩 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태성선생님과 같은 뜻을 가진 재일동포들이 함께 이런 사업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차별만 없어지면 조선학교에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그게 아니었다. 어떠한 주제에 깊이 알아보면서 배워가는 즐거움이 바로 이런 것이다.

 

해방 후부터 꿋꿋이 지켜온 민족교육은 앞으로도 지켜질 것이라 믿고 있다. 우리민족은 참으로 대단하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의 문제점을 무시하기엔 무리가 있다.

앞으로 나는 조총련이 탈(脫)이념화, 초(超)민족화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조총련이 어떻게 나올지 두고 봐야 알겠지만 민족교육이 지켜질 것이라 믿는다.

 

나는 이 연구보고서를 쓰면서 생각이 넓어지고 우리나라의 중요한 역사인 재일동포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 것이 기쁘다. 그리고 앞으로 들어올 후배들이 나와 같은 주제를 배울 것이라는 것이 정말 기쁘기도 하고 잘은 모르겠지만 즐겁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이 연구보고서 작성을 지도해주시고 자료를 제공해주신 김령순선생님을 비롯하여 동산, 담별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부족하였지만 나의 첫 연구보고서는 이상으로 마친다.

 

2006년 12월 15일 연구자 전지용

 

(붙임)

 

1. 조선학교의 주요연표

1945.09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 ‘국어강습소’ 형태로 시작하다.

1948.01.24

문부성학교교육국장, ‘조선인설립학교의 취급에 대하여’(조선인학교의 폐쇄를 요구하는 내용)를 각 도도부현 지사에게 통달.

1948.04.24

한신교육투쟁

1949.09.08

재일본조선인연맹(1945.10.15결성) 해산명령

1949.10.19

조선인학교 폐쇄명령

1953.05.18

교토부, 조선학교를 각종학교로서 인가(이후 타 부현에서도 인가를 하여 1975년에는 전국에서 인가됨.)

1965.12.28

문부성사무차관 통달

-‘조선인만을 수용하는 교육시설의 취급에 대하여’

-‘일본국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법적지위 및 대우에 관한 일본국과 대한민국 간의 협정에 따른 교육관계사항의 실시에 대하여’

1968

외국인학교법안이 국회에 상정되나 폐안.(이 법안은 조선학교에 대한 간섭, 탄압장치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권리보장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 안 됨.)

1968.04.17

도쿄도, 조선대학교를 각종학교로서 인가.

1989

일본방송협회주최의 NHK합창경연대회에 조선학교의 정식참가가 인정됨.

1991.03

전국고등학교야구부연맹(고야련), 외국인학교의 고교야구대회 참가를 승인.

1992.10

고체련(전국고교체육연맹)문제, 일변련이 인권침해라고 하여 시정을 권고.

1994.03

고체련, 각종학교에도 동연맹 주최의 대회참가 승인을 결정.

1994.04

JR각사, 통학정기운임의 할인율 격차를 시정. 일조교와 전수학교, 각종학교의 격차가 없어지다.

1996.09   

카와사키시립 간호단기대학이 조선학교고급부졸업생의 수험자격인정을 결정. 이를 전후하여 오사카부립간호대, 오사카부립의료기술단대, 히로시마현립보건복지단대도 인정했음이 알려져 그후 교토부립의과대학의료기술단대, 교토시립간호단대도 1998년도부터 인정함.

1997      

전국중학교체육연맹(중체련)주최의 대회에 조선학교 학생들의 참가가 가능하게 됨.

1998.02

조선인학교의 자격조성문제에 관한 일변련 권고.

1998.06

아동권리조약위원회, 수험자격 등 처우차별 시정을 권고.

1998.08

교토대학대학원 이학(*물리학)연구과, 조선대학교 졸업생의 수험을 인정.(교토대 대학원에서는 이어서 교육학연구과, 경제학연구과, 문학연구과, 법학연구과, 인간환경학연구과가 문을 연다.)

1998.09

조선대학교 졸업생, 교토대학 대학원 이학연구과 합격.

1998.11

자유권규약위원회, 조선학교처우에 대한 염려를 표명.

1999.01

큐슈대학 대학원 비교사회문화연구과가 조선대학교 졸업생의 수험을 인정.

1999.05

교토한국학원, 고체련 가맹 인정됨.

1999.07.08

외국인대학의 졸업생에 대한 대학원 입학자격을 대학원의 자주적 판단에 위임.

2001.03

인종차별철폐조약위원회, 수험자격, 치마저고리사건 등에 대해 권고.

2001.08 

사회권규약위원회, 공적조성, 수험자격 등의 차별시정을 권고.

2003.09.19

한국학교나 중화학교 등 거의 모든 외국인학교에 대해 정부가 대학입학자격을 인정하는 한편, 조선학교에 대해서는 그 졸업생 개개인에 대한 각 대학의 개별심사에 따라 자격이 인정되는 형태가 취하여짐.

2003.10.7

간호전문학교 등의 입학자격도 졸업생 개개인에 대한 개별심사의 형식이 취하여짐.

2004.1.26現在 

국립대학83교중 82교가 조선학교졸업생에 대한 입학자격을 인정.

2004.1.30

아동인권조약위원회, 수험자격차별이나 사회적차별에 대해 염려를 표명, 자기의 문화를 누리며 자기의 언어를 사용하는 기회의 확대나 의식계발강화 등의 시정을 권고. 

2004.3.9

교또조선중고급학교 졸업생, 동교 졸업생의 자격에 의한 수험생으로서 교토대학에 합격.

 

2. 참고로 한 자료들

 

- 아힘나 운동본부 김종수상임이사의 인터뷰기사

(http://happylog.naver.com/ahimna050405/123456793513)

 

- 영산대학교 최영호교수의 한일시평 (www.freechal.com/choiygho)

 

- 에다가와 재판 홈페이지

(http://www5d.biglobe.ne.jp/~mingakko/minapi05327.htm)

 

- 민족교육 권리사전 홈페이지

(http://www.k-jinken.ne.jp/minzokukyoiku/index.htm)

 

- 「재일조선인 그들은 누구인가」 (삼인)

 

- 한신대학교-조선대학교 동문초청심포지엄 자료집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 속에서의 한․일․재일 청소년 교류와 평화교육」 중에서, “민족교육의 역사와 현황 그리고 대안” 유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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