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학년도 연구보고서 우수작

재일조선인 1세들의 삶 - 내가 만난 1세들의 경험을 토대로 -

 

 

                                                                                 김현철❘2006학번•기초 1년

 

 

1. 들어가며

 

이전에는 평화(平和)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고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아힘나 평화학교에 와서 평화(平和)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고, 재일조선인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 재일조선인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생님들은 우리들에게 역사와 관련해서 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 답을 스스로에게 물어가며 재일조선인이라는 단어를 배워갔다. 일본까지 가서 재일조선인의 삶과 직접 만나서 영상에 담았고 지금까지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서 완성하였고, 지금도 재일조선인에 대해서 계속 배워가고 있다. 그 어려운 재일조선인이라는 단어를 알아가며 평화를 배우게 되었다. 우리학교에서는 한 학년을 올라 갈 때마다 연구보고서를 쓰는데, 재일조선인의 삶을 더 배우고 싶고, 더 알아가기 위해서 재일조선인 1세들의 삶을 주제로 정하였다.

 

이 보고서는 내가 직접 만난 재일조선인 분들이 일본에서 강제노동을 당하며, 또한 해방이 되어서도 고향에 못 돌아가고 꽃다운 청춘을 이국에서 다 바치고 지금까지 살아오신 삶을 그대로 쓴 것이다. ‘재일조선인 1세들의 삶’이 주제이지만 내용은 내가 만난 분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내가 연구한 것은 별로 없고 마음으로 느끼기만 한 것으로써 사실 연구보고서라고 하기는 부족하지만 열심히 쓴 글이다.

 

 

2. 재일조선인을 알아가는 과정-내가 재일조선인 1세들의 삶과 만나기까지

 

나의 고향은 함경북도 (북한) 이다. 나는 북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재일조선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전에는 평화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런 것에 대해 생각을 해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국에 와서, 그리고 아힘나 평화학교에서 평화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고 재일조선인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 재일조선인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생님들은 우리들에게 재일조선인에 대해서 질문만 주시고 답은 가리켜 주시지 않았다. 그 답을 스스로에게 물어가며 재일조선인이라는 단어를 배워갔다. 우리는 재일조선인 분들의 삶을 직접 만나기 위해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하고 카메라 다룰 줄도 모르는 우리들이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인해 동아방송대학 형들에게서 카메라 다루는 법을 익히고 또 김령순선생님으로부터 재일조선인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일본까지 가서 재일조선인의 삶과 직접 만나서 영상에 담았고 지금까지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지금도 재일조선인에 대해서 배워가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를 만드는데 정말로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김령순 선생님의 가족 분들, 우리들의 통역도 맡아 주시고 재일한국인 징용희생자 위령비에도 안내해 주시고 재일조선인에 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신 주문홍 목사님, 휴우가묘지에 묻혀 있는 재일조선인들의 그 소리 없는 소리를 모두가 들어야 한다고 하신 이누까이 목사님, 그리고 우리 아힘나 평화학교의 김종수, 조진경, 김령순 선생님들도 우리에게 정말 많은 조언을 해 주셔서 우리의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나는 이번에 재일조선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앞으로 재일조선인이라는 단어를 더 깊이 알아갈 것이며, 또한 한국의 청소년들이 재일조선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조금이나마 알게 되기를 바란다.

 

 

3. 재일조선인 1세들의 증언

 

재일조선인 1세 분들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들은 정말 손자 손녀가 찾아가는 마음으로 편지도 썼다. 과연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 어떻게 그분들에게 다가가야 할까? 하는 것을 고민에 또 고민을 해서 질문들을 만들었고 그분들에 대한 많은 공부와 인터뷰 연습을 거듭하였다. 우리가 1세 분들과 잘 만날 수 있기까지에는 많은 분들의 숨은 노력이 담겨져 있다. 이 증언들을 길이 역사에 남기고자 이렇게 인터뷰 내용들을 문답식으로 정리해서 쓴다.

1) 재일조선인 1세이신 배래선 할아버지의 강제 탄광노동에 대한 증언

 

2000년 12월 2일에 이 납골당 말하자면 이 무궁화당을 건설했습니다. 이것은 과거 일제시기에, 재일동포들이 지금 60만 일본 땅에서 살고 있는데, 이 사람들의 역사로써 이 당을 건설해가지고, 영원히 이 무궁화당을 우리는 지켜나가면서 과거의 일제시기에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그런 것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당을 건설을 했던 것입니다. [무궁화당에 대하여 - 배래선할아버지의 설명]

 

[질문]

일본에 오셨잖아요. 고향에서 어떤 일을 하시다가 언제 오셨어요?

 

[대답]

일제시기 그때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했기 때문에, 조선 땅에 무슨 기업도 없고 농사를 짓다가 일본에 끌려 왔어. 가족들은 전부 다 잘 있고 내만 여기에 끌려 왔어. 그렇게 해 가지고 해방이 되어서 자기 나라에 돌아가려고 했지만도, 그것이 잘 안됐던 거야. 왜 안됐는가. 그러니까, 남북의 분단이 있었고, 남북 전쟁, 이런 것이 있었고. 또는 일본에서, 이렇게 우리나라에 가려면 배를 타고 가는데, 그 운송하는 배가 없었고. 이러한 어려운 조건 속에서 자기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 땅에서 현재까지 있게 되었지.

 

[질문]

아까 말씀하셨는데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고향에서 강제연행이 되셨는데 어떤 방법으로 연행 되었나요?

 

[대답]

내가 청년시대 그때 나이가 우리나이로 22살인가 그렇게 되었거든. 그래서 그 나이에 말이여, 일본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거야. 그전에도 강제징용이 있었지만도 안가고 이리저리 피하고 했지만도 할 수 없어서 일본에 오게 되었단 말이야. 일본에 간다, 안 간다, 이렇게 할 때에 행정기관, 읍이라든지 이런데서 와가지고 가라고 하고 안 간다, 이렇게 하니까 경찰을 불러 가지고 날 잡아 가지고 가라고 말이야. 그때에 일제놈들에 의해 조선반도에도 배급이 있었던 거야. 농사를 지어도 전부 다 빼앗아가고 나중에 배급을 주는 거야. 하루 얼마씩 배급을 주는 거야. 그러니까 모든 것이 배급이란 말이야... 그래서 내가 안 간다고 하니까 가족들에게 배급을 안 주겠다고 협박해서 할 수 없이 일본에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거지.

 

[질문]

탄광노동을 일본이 강제로 시켰다고 하셨는데 탄광노동 할 때 일본인노동자랑 조선인노동자랑 뭔가 차별이 있었나요?

 

[대답]

아 그렇지. 식민지 통치를 받는 민족이기 때문에 일본사람 대우와 조선사람 대우는 아주 틀렸지. 자기나라 민족이다, 그러니까 조선을 자기가 식민지로 했다 해서 ‘너희들도 다 일본사람이다’라고 말은 하지만도 실지로는 차별이 아주 심했어.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사람들은 제일 아래 층에서, 세 단계 세 층으로, 그러니까 한 40미터 밑에 굴이 있고 그 밑에 한 40미터 굴이 있고 또 그 밑에 굴이 있어. 세 단계로서 석탄을 캤었는데 조선인노동자는 제일 아래 층에서 일을 했지. 굴 속에서 일하는 것만 해도 위험한데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사람들은 제일 깊고 제일 위험한데 들어가서 일을 했어.

 

[질문]

일본에 오셔서 생활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나요?

 

[대답]

생활이 어려웠었지. 해방 후에 그때는 일본사람이다, 일본국민이다 이렇게 말했는데 그것을 1947년 국제회의에서 조선사람들은 조선사람이다, 일본사람이 아니다, 그것을 확실히 한 거야. 그렇게 해 가지고 일본사회에서 더욱 더 말이여, 차별이 아주 심했어. 그래가지고 일할 데도 없고 어디 뭐 장사 하려고 해도 돈도 없고 어디 가려고 해도 갈 수 도 없고 이렇게 되어가지고 일본 땅에서 머물고 차별을 당하면서 그렇게 있다가 1960년 때 그때 말이여, 일도 없지 차별이 많지 이렇게 해 가지고 살 수 없어서 북조선에 지금 말이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약 10만 명이 귀국을 했어. 그 차별이, 지금 재일한국 사람들에게 차별이 많이 완화되었다고는 하지만도 아직 뿌리는 그대로 남아있어. 지금도 재일동포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 이런 것이 많이 있어.

 

[질문]

노동을 하고 임금을 받지 않았습니까?

 

[대답]

노동을 해도 임금은 받지 못했지. 왜 임금을 못 받았는가? 임금 받으면 그 돈을 가지고 도망을 칠 수 가 있거든, 그렇다보니까 돈을 안 내주었던 거야. 이 구역에 탄광이 있다 하면 그 탄광에서 돈 대신 말이여, 탄광에서 발행한 돈과 같이 쓰게 된 표를 받았어. 그러니까 기차를 타려고 하면은 차표는 못 사지만도 그 탄광 내에서만 쓰는 말이여, 돈 같은 건 있었어. 그 돈을 받아가지고 썼지. 그러니까 다른 데는 절대로 못 썼어. 그 탄광 내에서 밖에...

 

[질문]

노동을 하시면서 집이라고 해야 할까 어디서 주무셨어요?

 

[대답]

‘료’가 있었거든. 그러니까 그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사람들의 ‘료’가 이렇게 쭉... 이렇게. ‘료’가 우리말로 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만 한 방이 있으면은 여기에 한 5~6 명 이렇게 집어 넣어가지고 거기에 말이여, 이불 같은 거 이런 것들도 같이 펴가지고, 같이 말이여, 이렇게 덮고 그러니까 저쪽에 가운데서 누워 자는 사람도 이쪽에서 잡아 댕기고 저쪽에서 끌어 댕기고 하다 보니까 가운데가 구멍이 나고 그런 생활을 했어. 그래서 이것은 이 할아버지의 경험인데, 내 경험을 말한다면, 아주 조그만 방이 있었는데 이만한 데를 감시인이 붙어 있었던 거야. 밖에 소변 하러 가자면 그 사람 허가를 받아야만 화장실을 갈 수 있었고 이쪽에 문이 있는데 그 곳으로 들어갔다 나갔다 하지만도 저 밖에서 딱 철조망을 치고 있어서 그런 문이 있었지만도 도망을 칠 수가 없었어.

 

[질문]

그러면 반대로 일본노동자들은 어떻게 생활했나요?

 

[대답]

일본노동자들은 일을 열심히 해가지고 돈도 받으면서 생활을 했어.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사람들은 전부 다 독신이었거든. 한 방에 여러 명씩 집어넣어 가지고 가혹한 노동을 시켰어.

 

[질문]

그러면 단체 생활을 하면서 먹을 것은 어떻게 구했나요?

 

[대답]

그러니까 <밥표>가 있거든. 오늘이 7월 2일이지. 7월 2일이면 7월 1일부터서 한 달 분 식권을 만들어 가지고 각 노동자들, 그 강제징용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어.

그러면은 그 밥표 오늘이 7월 2일이면 조식표, 또 말이여 중식표 그리고 석식표 그러니까 저녁식사표, 이런 것을 받아 가지고 먹고... 밥도 너희들은 말해봤자 잘 모르겠지만도 우동 알고 있어? 전부 시래기 이런 것 하고, 그 보리하고 쌀도 조금 들어가고 이런 밥이 우리는 그때 말이여, 한 20살 때 되다보니까 한 10 그릇도 먹을 수 있었거든. 그런데 그 식사라고 하는 것이 한두 번 집어 먹으면 없어지는 거야. 그것을 아껴 가지고서 조금씩 먹고... 반찬이라고 하는 것은 그때에 된장도 없고, 물에다가 소금을 타 가지고 거기에 야채를 조금씩 넣어가지고 그것을 떠 주었었어. 무 조그만 것을 말려서 김치를 담아 가지고 아주 얇게, 이 종이처럼 얇게 이렇게 썰어가지고 그것을 두 조각 밥 위에 올려주고... 그러다 보니까 배고파서 자꾸 넘어지는 사람들, 영양실조에 걸려서 죽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많았어.

그리고 그 탄광 깊이 들어가... 자기의 몸은 들어가 있지만도 석탄은 파야 되거든. 석탄을 파다가 천장이 무너지면 죽거든. 그렇게 일을 했어. 그렇지, 나도 거기 탄광에 와가지고 도중에서 도망쳤어. 도망치다가 붙들리면 놈들한테 폭행당하고... 그렇게 해 가지고 죽은 사람도 있지만... 붙들리면 붙들리고 다행히 도망치면 도망치는 거지, 그런 생각으로 도망쳤는데 다행히 나는 붙들리지는 않았어. 그렇게 해 가지고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일 좀 하다가 1945년 8월 15일을 맞이한 거야.

 

[질문]

광복 후에는 어떻게 생활 하셨나요?

 

[대답]

광복 후에 자기 나라에 가서 부모 형제들 먼저 만나려 했는데...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손에서 풀려났지만 갈 수가 없었어. 갈수 없다는 것은 배가 없어서 그랬어. 일본 땅에서 가령 해변 같은 데에 모두다 모여 가지고 배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배가 안 오다 보니까 서로 돈을 내가지고 내가 얼마 내겠다, 내가 얼마 내겠다, 그런 식으로 그 돈을 모아가지고 조그만 어선, 고기 잡는 배, 이런 것을 사 가지고 사람들이 말이여, 몇 십 명이 타고 가다가 태풍에 전부 몰살하는 그런 사건도 일본 전국에 많이 있었다네. 와가마쯔라고 하는 곳에서 1945년 8~9월 달쯤 애들, 어른들 시체가 저 바다에서 죽어 가지고 70~80 명 쯤 해변가에 떠올랐어. 그 조선사람들이 모두다 그 묘지에 전부 묻혔어. 지금도 거기에서 매년 9월 달에 제사를 지낸다.

 

[질문]

어제 석탄박물관에 다녀왔거든요. 그래서 거기서 봤는데 노동자들이 옷도 다 벗고 되게 껌껌하잖아요. 그런 곳에서 석탄 옮기는데 네 발로 막 옮기는 것을 봤어요. 정말 그렇게 심하게 노동을 하셨나요?

 

[대답]

아 그렇지. 그보다 더 심하게 노동을 했지. 탄광이라고 하는 곳은 여름에는 아주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어. 지하 몇 ㎞에서 일을 하다보니까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어. 탄광 내에는 쥐가 많이 있었어. 계획적으로 탄광경영자들이 쥐를 잡아넣고 이 산이 무너진다, 라는 것을 쥐가 먼저 알고서 뛰쳐나오거든.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걸 보고서 저기도 피해야겠다, 그런 식으로 했어. 4 교대로 지금 일을 하고 있는데 그때는 밤과 낮, 2 교대 12시간씩 일을 해야 했는데 어떻게 잘 못해 가지고 12시간이 13시간 14시간 15시간이 될 때도 있었다. 순조롭게 일을 하게 되면 12시간에 일을 마치는데 그렇게 안 되었지. 그러니까 낮에 일을 나가면 아침에 해가 오르기 전에, 어두운데서 일해가지고 또 어두울 때 들어오거든. 밤에 일하는 사람들은 낮에 들어와 가지고. 저쪽에서 밤에 일을 하다보니까 또 그 이튿날 낮에 들어오고. 그러니까 이런 것이 두 번 다시 없도록...

 

[질문]

탄광 내에서만 쓸 수 있는 대용화폐로 다 지불을 받으셨는데 그러면은 해방이 되고 돌아갈 사람은 그걸 바꾸어서 가야 되는데 그 바꾸는 것도 전혀 허용이 안 되었나요?

 

[대답]

그 탄광에서 나가면은 아무것도 말이여, 그저 종이밖에 가치가 없는 거야. 그러니까 그것을 가지고 어디 가서 돈으로 바꾼다, 어쩐다 할 수도 없는 게고. 그 탄광에 가봤자 일할 때 그 탄광에서만 임시로 쓰라고 내 주었지 그것을 또 회수한다 그런 것은 없었지.

 

[질문]

그러니까 일시키기 위해서 밥 먹이고 재우는데 쓰는 화폐. 그 이외는 아무것도 없었다. 화폐가 있으나 마나였네요.

 

[대답]

재일동포들이 강제징용에 보상을 해라 해가지고 재판은 일본 땅에서 걸지 않고 있거든. 그래서 이 무궁화당을 건설하자고 운동을 시작했던 시기에, 그때 아주 바쁠 때에 후쿠오카의 변호사들이 나한테 강제징용 재판을 하면은 어떤가? 이렇게 제안을 했었어. 일단은 재판을 하게 되면 이 일이 잘 못될 수 있었거든. 그래서 이 일을 마치게 되면 부담 없다, 그렇게 거절을 했었지. 그래 가지고 2 년 후에, 그러니까 1980년 쯤 되어서 중국사람들이 강제징용 재판을 후쿠오카에서 하는데 우리가 전면적으로, 우리 ‘무궁화당 우호친선의 회‘가 전면적으로 후원을 했었어. 우리는 재판을 못하지만도 중국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재판에서 이겨야 된다. 그렇게 해가지고 미쯔이 재벌을 상대로 재판을 했는데 후쿠오카에서 초기 재판에서는 이겼거든. 미쯔이가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라, 일본정부는 기업계하고 정부하고 과거에 아주 좋지 못한 그런 것을 쭉 지적하면서 정부는 보상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해서 한명 앞에 일본 돈으로 900 만 엔씩 보상을 해라 했는데 피고 측에서 재판을 또 걸었어. 처음에 재판에서 이겼다 보니까 두 번째 재판에도 이길 것이라 했는데 두 번째 재판에 기업계 하고 정부에 대해서 아주 강력히 좋지 못한 행위에 대해서 지적을 하면서, 이런 일이 두 번 다 시 없도록 할 것과 과거의 그러한 좋지 못한 행동을 인식해야 한다, 이렇게 지적은 했지만도 너무나 시간이 늦었다. 그렇게 해 가지고서 재판에 졌어. 최고 재판소에 가서 지금도 재판을 하고 있어.

여기 (후쿠오카) 변호사로 있던 마쯔오까란 변호사가 도쿄로 이사를 해 가지고 그 재판 또 재일동포들의 여러 가지 보상 문제 이런 것을 도쿄에 집중하고 있거든. 그런 재판 그런 사업을 하겠다, 해가지고서 전부 가족이랑 이사를 갔어. 그런 것도 있어.

 

 

2) 재일조선인 1세이신 편옥분 할머니의 일본에서 살아오신 삶과 당시 여성들의 생활에 대한 증언

 

당시 조선사람들은 조선에서 시모노세끼항으로, 시모노세끼항에서 규슈 모지까지 또 작은 배를 타고 건너갔다가 모지에서 각지로 기차를 타고 퍼져나갔다고 한다. 도일하여 3년간은 부모님과 고향이 그리워 매일 매일 울면서 지내셨다고 한다. 일본말을 하나도 몰라서 무엇 하나 살 때도 상점에 가서 사고 싶은 물건을 말없이 손가락질하여 겨우 물건을 샀고, 말을 모르니까 얼마인지 가격도 몰라 항상 화폐 중에서 가장 큰 단위의 화폐를 제시하여 거스름을 주는 대로 받고,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당시 돈은 동전이 없어서 작은 단위까지 다 지폐였는데, 상점에 갈 때마다 잔뜩 거스름돈으로 받는 지폐가 쌓여 갔다고 한다.

[질문]

할머니 소개 좀 간단히 해 주세요. 성함이랑 연세랑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세요.

 

[대답]

아 내 나이는 84.

고향은 영일군 진행면.

내 시집 갈 때는 친정하고 사돈 하고 그리 안 떨어져 있었어. 시방은 어른들 다 세상 떠나고 없다 보니 조카네 들이 많이 있어. 내가 형제가 6남매 남자 형제가 둘, 여형제가 넷인데 이제 다 돌아갔어.

 

[질문]

그러면 형제분들 중에 몇 번째이세요?

 

[대답]

형제는 언니들이 위에 둘 있고 밑에 동생이 있고 위에 오빠가 둘 있어요. 나는 다섯째이고, 오빠, 동생은 일본에 있다가 해방이 되고 다 돌아가고.

 

[질문]

몇 년도에 태어 나셨어요? 우리나라 나이로 84세이시면 21년 22년 이렇게 되시네요. 저의 어머니가 23년생이세요. 제가 9남매 중에 9번째입니다.

 

[대답]

형제가 많으면 좋을 때가 많지.

 

[질문]

네, 좋을 때도 많고 사고도 많고 걱정거리도 많고 그렇지요.

 

[대답]

형제가 많고 부모가 너무 오래 살면 우리말로 험한 꼴 많이 본다 하지.

[질문]

그래도 어르신이 오래 살아주셔야 자식들이 힘이 되지요. 그래도 막내 된 입장에서는 어머니가 오래 살아주셔야, 저의 형님들은 어머니 하고 오래 살았지만 저는 조금 살았잖아요.

 

[대답]

내가 일본 들어올 때에는, 18 나이에 시집가고 19 나이에 일본 들어 왔어. 옛날은 일본에 모두다 징용으로 뽑혀오고 했지... 일본 탄광에 넣겠다고, 그래서 전부 그때는 일할 수 있는 나이의 애들은 모조리 다 데리고 왔거든. 일본에 모두 징용 뽑혀오고 했지, 징용으로 사람들이 많이 잡혀 왔잖아. 남편은 일본에 잡혀나가 가지고 한 1년 되가지고 한국에 있는 자기 아버지가 몸이 편치 않아 정말 죽느냐 사느냐 하는 때에 오라고 해서 어떻게 해서 일본에 있다 나왔어. 나와 가지고 아버지는 아들 보고 좀 몸이 나았고. 그래 어른들이 말하기를 네가 이제 일본 또 가면 언제 또 나오기나 하겠나, 장가도 갈까 모르지만은 나온 김에 장가를 가라고, 그렇게 된 거지. 그래서 나와 결혼을 하게 된 거야. 옛날 우리들이 클 때에는 혼인도 뭐 한 번도 안 만나보고....... 본인들이 한 번도 못 만난 채 그냥 부모님들이 정해주는 사람과 결혼을 했지. 12월 달에 결혼을 하고, 남편은 장가와서 엿새 만에 일본에 또 들어왔어. 들어와 가지고 뒤에 날 오라고 편지를 보내왔어. 그래서 나는 결혼 해가지고 1년 만에 일본 들어오게 되었어.

 

[질문]

6일 보시고 일본에 오셨으면 얼굴 제대로 알아 보셨어요?

 

[대답]

서로 얼굴을 모르지. 남편도 아내 얼굴을 모르고 나도 남편 된 사람 얼굴을 모르고 그리고 일본에서 만났어. 그래 그때는 정말 어떻게 했나... 부산에서 시모노세끼에 왔는데 아는 사람이 와야 얼굴을 서로 알고 하지만다들 한국에서 올 때에 주소만 가지고 왔어. 부산에서 와 가지고 암만 봐도 얼굴을 모르니까, 봐도 모르잖아. 내 시집 갈 적에 한 번만 봤거든. 항구에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마중 나온 사람을 따라서 가버리는데 나는 데리러 온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고향 떠날 때 일본 가면 어쨌든 어디에도 가지 말고 거기에 있어라고 하니까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지... 아무도 나한테 말하는 사람이 없어. 암만 바라보고 있어도 가자하는 사람이 없었어. 그러다가 사람들이 하나 둘 다 사라지고, 어떤 남자랑 나만 둘이 남았거든. 근데 말을 붙이려고 해도, 그게 잘 안 돼서... 둘이 그저 고개 숙이고 몇 시간 앉아 있으니까 새댁이냐고 물어보고, 어디서 왔어요?라고. 어디서 왔다고 할 수 있나, 그래 가만히 있으니까 고향만 가르쳐주소 하는 거야. 미안하지만 어디서 왔어요? 그리고 서로 알고, 같이 가자고 하는데, 부끄러워서 가는 내내 둘 다 아무 소리도 안하고 그냥 고개 숙이고 가만히만 있었지... 슬펐어...

 

살면서 처음에는 어머니 아버지 밖에 생각 없는 거야.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 싶어 3 년을 울었어. 3 년을 나날이. 나날이 우니까 이웃에 사는, 먼저 집안 아제 되는 사람이 이 사람 와 그리 자꾸 우노, 울지 마라, 자네만 안 그렇다, 다 이 객지에 나온 사람들은 자네도 다 한가지다, 다 부모 없이 나와 있는 사람들이다, 너무 울지 마라... 그래가지고 3 년 동안 여러 가지가 있었어.

 

조선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그때 그랬다지.

우리 들어올 때에는 먹을 게 없었어. 일본 땅에도 먹을 게 없었어.

군대들에게 먹는 식량을 다 보냈어. 먹는 게 없었어. 숟가락 하나라도 옳은 숟가락 없었고 우리는 4 년을 있어도 솥 하나가 없었어. 전쟁하니까 철이 필요하다 하고, 집안에 있는 숟가락까지도 다 가지고 갔고, 먹는 것도 군대들에게 다 보내주느라고 먹는 게 없었어.

 

배급은 오니까 백반에 주는데, 한 달 먹는 게 배급 받으면 둘이 받는 게 요만큼 밖에 안 돼. 잡곡을 가져다 주거든. 그전에는 좁쌀, 보리쌀, 콩 기름 빼고 난 것이나... 그런데 먹을 게 모자래. 일본사람은 한국사람처럼 쑥을 뜯어 먹을 줄을 몰랐거든. 동생이랑 올라가 쑥을 뜯어다가 삶아가지고 바케스에다가 시멘으로 절구를 만들어서 그기에 찧어서 해 먹었어.

 

[질문]

저는 처음으로 일본에 왔을 때 일본어를 모르니까, “이꾸라데스까?”(얼마입니까) 하고 말을 하고는 무슨 말인지 모르니까 지폐를 내놓고는 동전을 가득 받았던 적이 있어서, 할머니의 그 고통을 조금 알 것 같아요. 그 이야기를 조금 더 이야기해주세요.

 

[대답]

처음에 와서는 부채 살줄도 몰랐어. 석탄불을 피워서 밥을 해먹고 했는데 그 불을 피우는데 부채로 이렇게 부채질을 해야 되는데, 그 부채도 하나 사지를 못했어. 일본말로는 우치와라고 하잖아. 고개를 숙여 부채질 흉내를 내면 아 부채인 것 같다고... 돈이 있어도 물건을 못 샀어. 그전에는 일본에도 물건이 없었어. 점수 그거 가지고 일점씩 그렇게 썼어. 물건이 없으니까 많이 살 수 없어. 돈이 있어도 못 사. 20점 밖에 안줘. 바지하고 옷만 한 벌 사면 다 없어져. 뭘 사도 그 점수 없으면 못 샀어. 우리 조선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그런데 살았어. 탄광의 사택 같은데서 조선사람들이 다 거기 살았는데, 한번 어디 가려면 높은데서 살아서 올라가고 내려가고 보통 일본사람들이 안 사는데 살았어. 그렇게 우리들이 고생한 거 말도 못해. 그때는 한 집이 작아도 제일 없는 집이 네 명이고 안 그러면 다섯 여섯 일곱 여덟이 되는 사람이 평균이고 그런데 그 아이들 데리고 살아가려면 참 이만저만이 아니야. 그전에는 한국에서 소나무 껍데기 벗겨 가지고 칠 떡도 하고 했지. 일본에 들어와 가지고도 그 모양으로 살았어.

 

[질문]

점표 이야기 하셨잖아요. 그러면 그걸 어떻게 모으셨어요?

 

[대답]

나라에서 주는 거야. 그때는 배급이라고 해서 전쟁 중이니까 일본도 마음대로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나라에서 정해진 것만 주었어. 일은 안 해도 상관없이 한 명에게 배당했어. 배급이 한 달에 한 홉 그 정도 밖에 없었어.

 

[질문]

그러면 아이와 어른은 (배급량이) 달랐나요?

 

[대답]

아이들은 작고 어른들은 조금 많고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조금 더 많이 주고.

 

[질문]

그러면요, 며칠에 몇 번씩 주었어요?

 

[대답]

일주일에 한 번 줄 때도 있고 한 달에 한번 줄 때도 있고 그 상황에 따라서 주었어. 지름이고 된장이고 전부 그램 몇 그램 그렇게 주고 쇼유(간장)는 배급 받아도 모자라잖아. 소금을 사다가 솥에 물을 붓고 쇼유 모도(素)라고 또 있어. 그거를 이제 사다가 갈아서 소금하고 넣어가지고 빨리 해가지고 그렇게 해 먹고 그랬어.

그때 한국사람들 탄광에 넣고, 탄광에 안 들어간다고 하면 두들겨 패고, 달아나다가 붙들리면 때리는 것도 보통 아니야. 소 꼬랑지 그 채찍으로 때려서 온 몸이 살점이 떨어지고 막 그 사람 그날 죽어. 그런 것도 보았어.

일본에서는 사람들이 당시 조선사람들에게 그렇게 독하게 한 걸 몰라.

 

[질문]

살아오시면서 특별히 일본사람들하고 차별 받아서 속상했다하는 기억이 있으면 이야기해주세요.

 

[대답]

아이들이 조선사람이라고 해서 일본사람들에게 멸시 당하고 괴롭힘 당하는 일이 제일 속상했지. 당시 조선사람들은 돼지를 기르는 일도 하면서 어떻게나 먹고 살고 했는데, 일본사람들이 우리아이들을 이지메를 하고 학교 뒤에 데리고 가서 돼지 돼지라고 해서 되게 두들겨 패거나...

아이들이 너무 이지메를 당하니까 할머니들이 조선학교를 세우자 그랬지.

옛날에는 혹되게 이지메를 당하니까 조선사람들이 다 모여서 조선사람들의 마을이 있었어. 마을에 일본사람들 집은 몇 채 없었어.

그리고 학생들이 박치기 비슷한 그런 싸움이 있었지. 이런 이야기가 글로 적어져서 나오지 않으면 한국에서 사는 친구들은 전혀 모르겠지.

3) 재일조선인 1세이신 조종태, 김광배 할아버지의 민족학교 설립 당시에 대한 증언

 

[질문]

민족학교가 생기기 전에 ‘국어강습소’가 있었다고 알고 있는데 거기에 조선인 분들이 많이 다니셨잖아요. ‘국어강습소’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대답]

해방 전에는 절대 여기 일본에서 조선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위반이었습니다.

딱 위반이라고 규정 해놓고서 우리 조선사람들이 모이면 위반이다 해서 잡아갔습니다, 경찰이. 그래서 그 야간강습소라고나 할까 야간에 동무들끼리 몰래 모여서 글을 가르치기 위해 준비하고, 그래서 쓴 글자를 이렇게 보이고 이건 무슨 글자다 이렇게 해가지고 설명을 하고. 가, 나, 다, 라 하는 이걸 절대 못 가르쳤어. 그걸 체계적으로 가르치면 위반이 됩니다. 그래서 잡아가고 이렇게 했는데 그래도 거기서 글을 아는 사람은 학생들을 새 사람이면 두 사람 씩을 맡아가지고 그래서 저 그 사람들 안 보는 떨어진 집에서 숨어서 글을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했습니다, 해방 전에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고나서는 우리가 학교를 짓자고 해도 바로 학교 건물을 지을 수 있었던 건 아니지요. 그러니까 일본의 공민관이라든지 일본의 절간이라든지 그런 곳을 빌려가지고 우리말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여기 일본에 있을 것이 아니리고, 그때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자기 본국에 돌아가야 되겠다고. 돌아가서 우리나라의 독립과 우리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일해야겠다고. 우리가 말도 모르고 글도 몰라가지고 자기 나라에 가면 부끄러워서 살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글을 가르쳤습니다. 그럴 때 한 제일 급한 게 12~13 명쯤 들어가는 방이 있다 하면 그 당시 해방 후에는 어떻게 됐냐면 막 그 방이 비좁아서 못 들어갈 만치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왜 그러냐면 조국에 돌아가야겠는데 글은 모르고 자기 이름도 모르고 이러니까 상당히 아쉬웠던 거죠. 그래서 일을 하던 노동자는 더군다나 조선에서 강제로 잡혀왔으니까 글도 모르고 학교도 못 다녔단 말이지. 그러니까 일본 땅에 왔다가 글을 가르쳐주는데 배워가야겠다, 이래서 다 모이고 일본학교를 다닌 아이들은, 야 내가 우리 아버지가 독립만세도 부르고 그런데 가려고 하는데 내가 조선사람인데 일본놈 글만 배워가서 되겠는가. 이렇게 해서 막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그 절간에 오고 강습소에 오고 이렇게 한 것이 해방 후의 우리학교의 시작입니다.

해방 전에는 일간에 가서 짬 시간에 놀면서 흙 위에다가 글을 써가지고 가르쳐주고. 일본놈들이 이 바보야 해도 잘 모르죠. 이 사람들이 자기 고향의 주소도 모른단 말이여. 그러니까 땅에 글을 써서 가르쳐주고. 한 자씩, 한 자씩 가르쳐가지고 자기 이름도 쓰고 자기 주소가 어딘지도 알고, 그래서 숨어서 배운 글자를 가지고 자기 고향에다가 편지도 쓰고. 해방이 되고 난 뒤에는 자, 나라가 독립을 했으니까 고향에 돌아가자고 바빠 맞은 사람은 요만한 쪽배를 타고 저 하카타 항구에서, 또 저 무슨 항구에서, 조그만 쪽배를 타고... 쪽배 말이여, 대여섯 명 밖에 못 타는데다가 10 명이나, 20 명이나 타고 가다가 배가 뒤집어져서 물에 빠져 다 죽고...이런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거 안 되겠다, 일본에 있는 사람은 우리나라가 좀 침착이 될 때 까지 우리가 글을 배우고 학교를 짓자, 첫째 우리글부터, 국어부터 가르치자. 그런데 한국에 갔다가 온 사람들, 밀항으로 와가지고 잡혀가지고 온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까 우리 남녘땅에 말이여, 미국사람이 들어가 있으면 나라가 침착이 되어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날은 아무래도 늦어지겠다, 그래서 여기서도 민족교육을 해야겠다고. 모두가 곤란한 속에서도 돈을 모으기 시작한 것입니다. 너 얼마 내라 너 얼마 내라 해서 돈을 모아서 학교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지어 가지고 교육을 하다가... 또 이거 학교가 좁아진단 말입니다. 좁아서 못 들어가면 또 큰 거를 짓자, 이렇게 우리 조선사람들이 돈도 없을 때 말입니다. 한 사람이 만원 2만원 10만원 씩 내놓은 사람들이 있단 말이여. 모두 다 돈이 있어서 내는 게 아니라 오늘 내가 일하면 가족들하고 최소한 먹고 남기고 그것을 한 달 모으면 얼마가 된다, 딱 계산 해가지고 그 돈을 수표를 끊습니다. 끊어가지고 줍니다. 그래가지고 은행에 가서 떼려고 하니 일본놈들이 잘 안 떼어준단 말이지. 그래도 자체의 힘으로 여기서(일본에서) 은행도 짓고 이렇게 해서 학교를 첫 번째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점차 커져 가지고서 지금 체계적인 학교로 발전됐는데. 이 학교를 처음 지을 때 많은 사람이 자기 힘의 10 배나 20 배나 될 만큼 돈을 냈습니다. 그래서 1 년 동안 내내 벌어가지고 학교 짓는데 빚진 것을 갚아주고, 그래서 또 일해서 몽땅 학교를 위해 바치고 그랬습니다.

[질문]

어떤 분들이 민족학교 선생님이 되셨나요?

 

[대답]

그때에 우리 조선사람들이 산다 하면 토목을 하는 토목장의 함바(飯場)에서 밥을 먹고 자고 했는데, 그 한 집에 많이 있으면 30 명도 있고 50 명도 있었는데 그러면 밤에 자면서 우리는 우리대로 비밀을 지켰습니다. 절대 그 세 마디 셋은 일본사람 귀에 들어가면 우리가 모두 다 아니까 일절 우리가 한 말은 일본놈한테 말 안 한다, 이게 철칙이었습니다. 왜 그러냐면 나라도 빼앗기고 그래서 강제로 데리고 들어왔는데 우리가 속에 있는 말을 다 하면은 그놈들이 우리가 움직이는 것을 다 장악해가지고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한단 말이여. 그러니까 밤에 잘 때도 이불 속에서 귀에다가 딱 대고 얘기를 하고 내일은 직장에 나가면 어디 가서 점심 먹고 나서 모일까 다 얘기를 합니다. 점심때가 되면 다 모이거든. 그래 밥 먹으면서 흙 위에다가 글을 가르쳐 줍니다. 너 고향이 어디냐, 경상남북도, <경> 자는 이렇게 쓴다. 그래서 한 1주일 지나면 너 한번 써 봐라, 그래 써가지고 알게 되면 아... 이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좋아했지요. 그래서 가르쳐주고 너 고향은 어디냐 물어보면 대체로 고향은 여기 여기입니다. 경상도 어디입니다...

그때 모집에 뽑혀온 사람이 제일 많은 사람이 어디냐면 경상북도 영일, 영덕 거기 사람이 많고 경상도에서는 어디냐 상주 사람 사천 사람이라든지 진주 사람이라든지, 전라도 보성 사람이라든지 그래 부산에 있는 사람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 또 제일 많은 사람이 어디냐면 전라도 사람이 많았습니다. 전라남북도 여수라든지 순천이라든지 이런데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면 자기 지방별로 온 사람들 대체로 주소를 우리가 일본에서도 지도를 보고 알거든요. 그래서 그걸 우리가 써 가지고 동무 주소가 어디냐 하면 지도를 요만한 걸 조그만 걸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여기가 너 고향이다. 이렇게 해서 살짝 가르쳐줍니다. 그러면 그 주소를 써놨다가 자기가 편지를 한번 써 봅니다. 그래서 자기 고향에 보내주고 그 편지에 답장이 오면 말입니다, 왜놈이 훔쳐 가져가서 뭘 썼는가 보기 때문에 편지가 오면 저 거기서 살림 사는 집 사람의 그 집 사람의 주소로 하면은 거기로 오거든요, 그러면 그 집 주인이 살짝 갖다 줍니다. 그러면 그 편지를 받아보게 됩니다. 그렇게 했습니다.

자기가 글을 배우면 그것을 또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주고 또 그 사람이 가르쳐주고... 지금 말하면 초급학교, 보통학교를 나온 사람들이지. 그런 사람을 딱 찍습니다. 너는 몇 명을 책임지고 글을 가르쳐라, 그러면 글을 아는 사람은 다 자기가 고생을 한 것을 아니까 안 가르쳐 준다 안 합니다. ~~~

경상북도 고령군이 내 고향인데 일본 소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자기 어머니 하고 한번 가보았는데 그 기억 밖에 없단 말이야. 그리고 지금도 얘기 했는데 해방이 되어 가지고 조국에 가려고 하니까 나는 중학교 다니고 있었는데 우선 말을 모른단 말이야. 말을 알아야 돼. 해방이 돼가지고 고향에 돌아가려고 하니까 우선 말을 알아야 돼. 말과 동시에 글을 가르쳐야 돼. 글을 가르쳐 주려고 하니까 글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단 말이야. 일본에 징용이라든지 끌려온 사람들이니까 일체 무식꾼입니다. 그러니까 우선 선생을 찾아야 돼. 조선 글을 알고 있는 선생, 그러니까 처음에 선생이라는 것은 조선에서 조금 글을 아는 사람들이 선생입니다.

그래가지고 우리학교가 되어 가지고 우리가 돈을 내고... 일본정부가 도와 준 거 아닙니다. 그때 조선 사람들은 돈도 안가지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실컷 일을 해가지고 그 돈을 모아가지고 글을 배우고 선생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우리 학교가 발전되어 왔습니다. 지금은 조선대학교를 나와가지고 선생을 하지만 그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때 학교 첫 번째 지을 때는 우리가 어려서 글을 못 배웠는데 시험을 쳐 가지고 중학교 들어갔는데 일본선생하고 한바탕 했단 말이지. 그래서 쫓겨났는데 우리 후대들에게 어떻게 해서 가르쳐줄 것인가, 우리나라의 기둥감이 되는 후대들, 이 기둥을 키워야 우리와 같이 고생을 안 한다. 솔직히 말해가지고 해방이 될 때에 완전히 나는 일본사람이었어. 그때는 우리말도 모르고 말이야. 그래가지고 중학교 2학년 때 일본군대에 가라고... 군대 가야 할 상황이 되었어. 소년병이라고 해가지고 요새는 그런 게 없지만 그때는 일본놈들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게 되니까 군대에 사람들이 없었거든. 그러니까 동무들과 같은 어린 나이에 군대에 가라고... 나는 중학교 2학년 때이니까 13살 14살 때 일본 소년병이라 해가지고 시험을 보게 되어서 시험을 봤는데, 그렇게 하고 있을 때 해방이 되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결국 군대에 안 가게 되었지만은. 그래가지고 세월이 조금 지나니까 더 이상 일본학교에 가기 싫어졌거든. 어떻게 해가지고 우리말을 배워야 하고 글을 배워야 한다 생각했어. 그럴 때에 조선학교가 됐단 말이야. 거기 가가지고 글도 좀 배우고 하고 있다가, 학교에서 그때는 글을 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선생이 되었지만, 조선말을 좀 아는 정도, 수학이라든지 이과 그런데 대해서는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단 말이야. 그런데 나는 그래도 그 당시 중학교 조금 다녔으니까 수학을 좀 알고 있었으니까 일본말로 수업해도 괜찮으니까 수학을 좀 가르쳐달라고, 학교에서 그렇게 요청이 왔단 말이야. 그래 일본말 같으면 내가 가르쳐 주겠다고, 그래가지고 내가 선생질 좀 했지요. 그렇게 하다 보니까 이제 완전히 우리말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처음은 나중에 우리나라에 돌아가서 더 배우면 되지 않냐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국 못 가게 되었습니다. 못 가게 되어가지고 그 당시 우리 내부의 조직이 있었습니다. 그 조직에 들어가서 그 조직 내에서 공부도 좀 하고 조선말도 좀 배우고 조선 글도 좀 배우고 그렇게 되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배운 지식을 아이들한테 가르쳐야겠다, 라는 생각은 있었죠. 민족이라고 할 때에 아무리 해도 하나는 핏줄이지만 하나는 말이 중요합니다. 말을 모르면 조선민족이라고 말 못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말을 배워야겠다. 그래 말을 가르쳐야겠다. 그래가지고 학교 세우는데 자기 있는 힘을 다 내가지고 해야겠다. 학생모집도 하고. 그렇게 해가지고 우선 자기도 배워야 하지만은 자기 후대들한테 우리말과 글부터 가르쳐야겠다. 그 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도 배워야 되고 지식도 많이 배워야 되고 과학도 배워야 되고 일본에서 그런 토대로 만들어야겠다. 이제 그런 생각을 해왔지요.

 

[질문]

민족학교 초기의 모습을 이야기해주십시오.

 

[대답]

학교가 될 때에 말이여, 학생이 많아 가지고 2부제를 했습니다. 아침 8시부터 2시까지, 그리고 2시부터 저녁 6시까지 2부제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은 말이요, 아침부터서 저녁 6시까지 가르쳤지요. 그런데다가 무엇을 했느냐, 지금처럼 인쇄소가 있나 뭐가 있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등사판 있죠. 등사판 모릅니까. 이래가지고 손으로 가지고 초지를 가지고 글을 써 가지고 이래가지고 먹을 묻혀 가지고 이렇게 누르면 이렇게 글이 나옵니다. 책이 한 권 있으면 그 책을 한 7 장이나 8 장씩 쭉 묶습니다. 선생들이 다 남아가지고 합판에다가 씁니다. 합판에다가 써가지고 그걸 밤새도록 그날 가르칠 걸 만들어 가지고 그래서 학생들이 오면 나눠주는데 학생들이 말이여, 선생님을 보고 웃는단 말이여. 왜 그러냐면 밤새도록 그 먹을 가지고 이렇게 뚱땅 해놓으니까 온 얼굴에 먹이 묻어서... 그렇게 학생들이 웃었다는데 선생님들은 모르고 나눠주고, 왜 웃냐고 물으면 학생들이 선생님 얼굴 거울 가지고 보시라고. 그래 보면 먹이 묻어서 형편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책을 만들어가지고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선생님들이 죽을 판이죠. 이것도 연구해야지 저것도 연구해야지... 그래도 나중에는 우리 중앙본부에서 민교부가 되어가지고 민교부에서 그때도 그 석판을 가지고 만들어서 책이 내려옵니다. 그때 많이 안 옵니다. 학급에 60 명이 있는데도 한 30 권 옵니다. 그래도 그때 좀 수월해집니다. 한 권 가지고 둘이서 보라고 이렇게 하고 선생님이 조금 수월했지요. 다음부터는 쭉 책이 내려오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민족학교가 발전해 왔습니다.

 

[질문]

2부제 수업을 할 만큼 학생이 많았으면 학생들의 연령대는 어떻게 됐나요?

 

[대답]

연령은 일본학교 다니다가 들어온 아이들은 정규과정을 다니다 들어온 아이들이라서 대체로 학년이 맞습니다. 1학년은 우리학교 처음 시작할 때부터 들어오니까 나이와 대체로 학년이 맞습니다. 그런데 5학년쯤 되면 영 다릅니다. 이거 뭐 장가 갈 총각들이 옵니다. 우리말, 우리글을 배우려고 오니까 국어시간에만 옵니다. 저녁 때 수업할 때에는 노인들이 옵니다. 나이가 50 살 된 사람들이 옵니다. 그러니까 애를 먹습니다.

 

[질문]

민족학교가 완공되었을 때 느낌이나 바라는 점 있으면 좀 들려주세요. 예를 들면 우리학생들이 말을 잘 배웠으면 좋겠다 등...

 

[대답]

그렇지요. 우리학교 구호가 있죠. 구호를 어떻게 걸었냐면 우리학교를 사랑하는 운동을 벌이자! 그 사랑 속에 뭐가 있냐면, 우리 민족의 말과 글, 역사를 잘 알고 세계에 나래 칠 수 있는 사람으로 되자! 이게 우리학교 구호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을 잘하는 학생, 수학을 잘하는 학생, 여러 가지 자기 소질에 따라서 공부하고 있지만은 그러나 주된 것은 우리말과 글 우리 역사, 이것에 정통하자는 것이지요.

 

[질문]

한참 학교가 제 궤도에 올라가서 학교도 세워지고 그리고 난 다음에 막 퍼져 나가는 것에 대해서 일본정부가 반가워 할 리 없었겠죠.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경찰들이나 그 공공기관이 학교를 탄압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이해가 되는데 그 미국이라는 나라는, 식민지 백성들인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은인 같은 나라잖습니까? 해방을 시켜줬으니까. 그런데 왜 조선학교를 탄압하는데 미군도 거기에 일본군들과 같이 동조를 해서 학교를 탄압했는지 굉장히 궁금합니다.

 

[대답]

아 그렇습니까. 우리가 우리말과 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우리 조직 자체가 자주성을 지키는 데로 노선을 전환했단 말입니다, 조선연맹 때로 부터서 지금 말하면 교육정책도 그렇게 바꾸었고. 그러니까 일본사람들이 말이여, 일본에 있는 조선사람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 더 학생들이 많이 자라나면 일본이 결국 큰일을 안 당하겠느냐, 이런 정책이 일본에서 나왔습니다. 학생들도 알아야 되는데 일본공산당 안에 조선사람을 일본공산당 밑에다 두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본공산당 지지를 하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청년조직인데 청년조직을 동원을 했습니다. 동원을 할 때 공화국 깃발을 청년들한테 앞에 들리고 갔는데 거기 대장에 들어서자마자 말입니다, 그 깃발이 전부 몽둥이가 되어가지고 그래서 막 일본 노동자들을 배경으로 해가지고... 그때는 일본노동자는 전쟁시대 아닙니까? 그러니까 막 공화국기를 들고 선두에 일본 궁성을 보고 들여 밀었단 말이여. 일본 경찰도 말이여, 그때는 총을 안 가지고 있었단 말이여, 몽둥이만 차고 있었단 말이여, 그러니까 막 대결이 되었단 말이여. 일본 경찰이 부상이 났죠. 그래서 일본 궁성 앞에까지 밀고 들어갔죠. 그러니까 일본 각료들이, 반동들이 “야, 조선사람들이 일본공산당하고 합류해가지고 우리나라(일본)를 점령하려 한다. 이거 큰일 났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도 탄압 할뿐 아니라 조선학교도 다 없애버리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미군이 좋다, 해라, 그건 해야 한다고.

그때로부터 우리를 탄압하기 시작했는데 우리가 이래가지고 큰일 나겠다, 그래서 노선을 전환한 겁니다. 그때 그대로 갔으면 일본에 있는 조선사람들 멸망입니다. 그 이후까지 우리 재일조선인의 운명을 몰아갈 사람이 있었습니다. 몇 사람 있었는데 지금도 역사에 남아있단 말이여. 그러니까 조선사람이 일본을 점령하려 한다... 그때로부터 우리학교를 철폐, 민족교육을 시켜서는 안 되겠다, 미군도 그래, 일본사람한테 탄압해라고.

그래서 그걸 우리가 반대해가지고 투쟁을 하는데 미군놈하고 일본경찰이 나와 가지고 4,24, 47년 4월 24일, 민족교육을 지키는 투쟁이 벌어졌단 말이여. 민족교육을 우리가 지켜야겠다고 했는데 맥아더 사령부에서 안 된다... 그래서 막 데모를 했단 말이여. 데모를 하니까 막 탄압을 해가지고... 그때 김태일이라는 소년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그때 나이가 몇 살이냐면 16살, 그 소년이 앞에 서서 ‘민족교육 절대 사수하자!’라고 우리말로 말했는데 총으로 쏴서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막 동포들이 격분해가지고 투쟁이 벌어져가지고 한 한달~40일 쯤 투쟁에 나섰습니다.

우리도 거기에 갔습니다. 지원하러 가가지고 민족교육 탄압을 하지 말라, 그리고 우리학생이 무슨 죄가 있어서 죽였느냐, 그걸 밝혀라! 이래서 막 굉장히 싸우다가 우리도 잡혀가 한 1주일 있다가 또 나왔죠. 너희는 다른데 사람이니까 돌아가라. 그래도 우리는 돌아오지 않고 거기서 또 했죠. 막 ... 삐라를 만들고 뿌렸거든요. 그래 또 한 2일 동안 갇혀 있다가 그래서 이제 지방에서 온 동무들은 돌아가라, 지방을 비워놓고 여기 올라와가지고 이러면 안 되니까. 그래서 우린 내려왔는데 야마구치에서도 교육투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에 그 당시에 내가 민족교육을 말이여, 투쟁위원회 그 위원장 겸 야마구치 교육자동맹 위원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야마구치에서는 우리가 성공을 했단 말이여. 투쟁해 가지고 현지사(県知事)한테 도장 받고 인가서 내고 인가신청 하면 학교 계속해라, 이리 됐었거든요. 그래서 그 투쟁을 우리는 성공시켜놓고 그래서 거기에 갔단 말이여. 그래 또 내려와 가지고 학교를 또 지켜야 되는 그런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군 놈이 말입니다, 철저하게 그거 하나하고 하나는 조국 정세가 험악했습니다. 부산 진주 그래서 저 광주, 여수, 막 투쟁이 벌어져 가지고 그때 미국 군대가 상처가 많이 났지요. 우리 조선의 인민위원회 미래청 청년들이 막 했단 말이여. 미국 물러가라고 이래가지고 투쟁이 벌어졌는데 그때 선두에 누가 섰냐면 박정희가 섰단 말이여, 그래 여수 발단 사건이 일어났죠. 그렇게 해 가지고 조선에 집중적으로 미군이 달라붙어 가지고 분쟁을 실시해 버렸죠. 그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못 생각하면 미군은 조선의 해방의 은인이다... 조선이 말이여, 총을 들고 일본제국주의하고 싸울 때 말입니다, 미국이 총 한발 주었나? 총 한 개 주었나? 아무것도 안 주어 놓고 우리가 싸워서 우리민족이 해방을 했는데 자기가 주인인 것 같이 떡 올라와 가지고 말이여, 우리는 미국과 전쟁 안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보십시오. 한국은 한국대로 말입니다, 우리민족이 독립했는데 미국이 해방군 같이 언론하고 와서 조선에서 온갖 것 다 뜨려먹고 말이여, 온갖 것 다 가져가고 그래서 독립을 5년 후견제... 5년이 몇 년이여, 얼마나 긴 세월이 지났습니까? 그대로 안 하고 그냥 그대로 점령 해버렸잖습니까? 그래서 국련에 가지고 가서 유일한 정부는 한국정부다, 그래서 조선을 두 개로 딱 갈라놓고 말이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미국놈이 마치나 조선의 해방자 같이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김대중씨도 말입니다, 북에 가려고 하는데 불러 가지고 당신 가지 말라, 가면... ... ... 이 소리를 했다 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 가면 당신 등대기에 총 구멍 난다고 말이여, 그러니까 가려면 가라고 협박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현실을 놓고 우리가 볼 때에 참말로 일본에서 정당한 자기 민족교육을 지켜 갔단 말입니다, 애를 쓰고 목숨을 걸고 했는데 우리를 탄압한단 말이여, 그런데 일본은 뭐냐 전쟁해서 졌단 말이여, 그 놈들한데 우리는 그 미국 놈들 하고 전쟁 한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해방된 민족인데 우리민족을 탄압하고 전쟁에 진 일본놈들을 이렇게 하고 있단 말이여, 이거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말입니다, 미군 철수한다 하면서 왜 철수 안 하는가? 오히려 이제 개편했죠. 개편해가지고 어디를 돌아 버리냐. 우리나라 다 먹잖는가, 하나는 중국 먹잖습니까? 이래놓고 말이여, 우리가 잘못 하면 미군은 해방군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질문]

일본으로 건너오실 때 당시 상황은 어떠하셨습니까? 예를 들면 가족들과 함께 건너오셨다 던지, 또는 밀항을 했다던지...

 

[대답]

나는 밀항은 안 했어요. 밀항한 바가 없는데 나는 정식으로 견학 올 때에 일본에서 공부를 좀 하자, 만날 공부를 못하고 우리 부모들이 고생을 하기 때문에, 야 일본에서 돈벌이가 잘 된다, 하니까 일본에 가서 돈 좀 벌어가지고 그래서 공부를 좀 하자, 그래서 우리 형이 야마구치 시모노세끼에 있다 하니까 찾아오자, 이래가지고 왔단 말이여. 오니까 못 만났단 말이여. 13살 먹고 왔으니까 암만 물어도 모른단 말이여, 주소 있는데 갔는데 그 주소에 없단 말이여. 그래 찾다가 안 되가지고 다시 고향에 갈라 하다가, 에이 여기까지 왔는데 고향을 또 가도 되겠는가? 어디 가서 좀 일이라도 하고 공부도 좀 하자, 그래서 오사카에 갔단 말이여. 오사카 가가지고 일을 해보니까 참 왜놈들 독한 놈들이에요, 독한 놈들이여... 그 어린 사람을 말이여, 추운 데다가 옷도 따뜻한 거 안 주고 헌 옷을 갔다가 입혀가지고 공장에 데리고 가가지고 공장 안에 바람은 불지요... 그런데 유리공장 만드는데 갔단 말이여, 그래 하다가 에이 이러면 안 되겠다, 가자 고향에, 가자 고향에... 가려고 정거장에 나와서 가만히 생각하다가 여기까지 와가지고 내가 가겠는가? 그래서 또 한 번 저 북으로 올라가자 해서 그래서 북해도까지 갔습니다. 북해도 가가지고 우리 친척을 찾는데 몇날 며칠 없이 정거장에서 말이여, 참말로 거지 짓을 하고 그래 기다리고 있다고 겨우 찾았단 말이여. 그래서 학교에 들어갔는데 친척의 도움으로 학교에 시험을 쳐 가지고 들어갔는데 아이고 한두 달 지내고 나서 이놈들이 막 건드린단 말입니다. 눈이 왔는데 눈을 갔다가 여기다가 막 주어놓고 말이여, 그때는 뭐라 했는지 압니까? 조선사람 보고 정말로 조선놈 얄궂은 놈이다... 이렇게 건드리면서 말이여, 자꾸 이 문을 연단 말이여. 그러니까 막 부아가 나서 한바탕 붙었단 말이여. 그런데 그 아이들은 많지 우리는 적지 하니까 우리가 죽도록 맞았단 말이여, 그래 맞았는데 우리한테는 선생들에게 아무 말도 안 하고 너희 왜 일본사람을 때렸느냐 해가지고 오히려 내를 책망한단 말이여. 맞은 사람은 이쪽이 맞았는데 그래서 막 선생하고 붙었단 말이여. 그래서 막 마지막에는 선생을 한바탕 때렸죠. 그래서 퇴학을 당했습니다. 너는 이 학교에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퇴학 당해가지고 탄광에 조요(징용)로 뽑혀 갔죠. 탄광에 가서 죽도록 고생하다가 해방되고 나서 말이여, 그 학교에 갔습니다. 가가지고 선생을 딱 잡아놓고 말이여, 이놈의 자식 너 나를 퇴학시켰는데 졸업장 내, 졸업장 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에 와서 조선사람이 돈을 벌어가지고 부자 산다는 사람이 말이여, 그 사람들이 잘 해가지고 돈을 버는 게 아닙니다. 그야말로 손톱에서 피가 나도록 까지 일하고 천대 받고 멸시 받으면서 주머니 안에 들어간 10원짜리가 말이여, 달아가지고 빤질빤질 빛이 나왔습니다. 그게 깎여 가지고 말이여, 그래서 그걸 모으고, 모으고, 모으고 해가지고 해방되고 난 뒤에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창업을 해가지고 그래서 조금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된 겁니다. 그렇습니다. ~~~

나는 부모님들한테 얘기를 들었는데 왜 일본에 왔느냐 했더니 나는 어디서 태어났는가 물어보니까 조선에서 자기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가 논을 다 일본놈들한테 빼앗겨 버렸단 말이여, 그래가지고 먼저 작은아버지가 일본에 와가지고 있었단 말이여, 그런데 아버지도 이제 일본에 온다 해가지고 부산 동네까지 왔답니다. 동네 와 가지고 내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부산 동네에서 태어났단 말이여, 그래가지고 아이를 낳기 시작하니까 일본에 온다 해봤자 오지 못해가지고 나를 동네에서 낳고 그래가지고 몇 개월 있다가 일본에 건너 왔습니다. 그래가지고 처음에 와서 오사카 그때는 마가카야마에 있었는데 거기서 일본 소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 조선사람이라고 해가지고 일본놈들은 뚜들겨 패고 그렇게 많이 했어요. ‘조센진’... 그때 우리가 있을 때에는 ‘촌따’ 라고도 했어요. 그 미국놈들이 일본사람들 보고 ‘잽’이라고 하던가? 그와 마찬가지로 조선사람 보고 ‘촌따, 촌따’ 라고 했어요. 그런데 비교적으로 나는 학교 다니고 있을 때 공부도 잘 했어요. 싸움도 잘 했고 말이여, 일본놈한테는 절대로 지지 않았어요. 또 하나만 우리학급에 조선 아이가 한 명 들어왔어요. 그 아이가 5살 위란 말이여, 그러니까 소학교에 들어오더라도 6학년 쯤 되는 아이가 우리하고 같은 학급에 있었단 말이여, 그 아이가 너무 크니까 일본놈들이 손을 못 댄단 말이여. 그러니까 비교적으로 우리한테는 많이 달라붙지 못 했어요. 그 당시는 그래가지고 공부를 해 왔는데 많은 사람한테 얘기 들어 보니까 일본놈들한테 뚜들겨 맞고 말이여, 애를 먹었다는 아이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은 우리는 비교적으로 그렇게는 안 되었습니다.

~~~

일본놈들 악독합니다. 참말 악독합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데 말이여, 장 담는 큰 통 안에다가 사람을 집어넣고 콱 눌러가지고 못을 쳐가지고... 아직 살아있는데... 중국에 그 포로로 온 사람들 그래가지고 땅에 갖다 묻어버리는 것 우리 보는 앞에서 했는데 일본놈이라는 게 보통 놈이 아닙니다. 잡아 가지고 뚜들겨 팰 때 보십시오. 이렇게 거꾸로 달아 매놓고 코에다가 고추 물을 넣습니다. 그러면 귀로 나오지요, 눈으로 나오지요. 나중에 안 되면 정말 말 안 들으면 묶어놓고 윤두(인두) 있죠. 윤두 압니까? 어머니들이 무엇을 할 때에 동정 달 때에, 그걸 뻘겋게 한 걸 가지고 찌집니다. 찌진데 살이 타져가지고 연기가 이렇게 납니다. 그만치 악독 했습니다.

 

[질문]

북해도(훗카이도)에 큐슈처럼 강제적으로 탄광노동에 시달린 우리 동포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홋카이도에 가셨을 때에 그 지역의 강제노동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들려주세요.

 

[대답]

그때에 북해도에 우리 강제로 끌려온 동족이 얼마 있었냐면 내 기억에는 전부 합해서 북해도에 34만이나 되었거든요. 제일 많은 데가 북해도 탄광 주식이었다. 거기가 제일 많았습니다. 그 다음에 미쯔이 탄광, 그 다음에 스미토모 탄광, 이렇게 해서 큰 탄광만 세 개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조선 사람이 제일 많이 사는 데는 어디냐면 유우바리라고, 유우바리 탄광에 제일 많이 살았습니다. 거기 가면 한 2만 명 있었어요. 2만 명 있었는데 거기는 전부 조선사람이 사는, 한국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전부 밭에서 일하다가 집에 가지도 못하고 논에서 일하던 옷 그냥 그대로 입고 와가지고 그 삼베 같은 옷을 입혀 가지고 말이여, 추운데 데리고 왔단 말이여. 밤에 누워 잘 때 담요 한 장입니다. 담요 한 장! 밑에다가 그 가마니. 가마니 압니까? 그래 밑에 그 가마니를 대놓으니까 밑에서 바람이 쓩쓩 들어오고.

 

[질문]

할아버지께서도 탄광에서 일을 하셨다고 하셨는데 그 당시 상황을 좀 들려주세요.

 

[대답]

그때 우리가 탄광에 있을 때에는 참 험악했습니다. 왜 그러냐면 그 콩 있죠. 콩을 기름을 콱 다 짜버립니다. 기름을 짜가지고 콩들에 이렇게 기름을 짠 것이 있었습니다. 저 창고에다가 짜 놓았다가 집어내면 곰팡이가 실어가지고 냄새가 납니다, 썩은 냄새가. 그걸 물에다가 담겨서 식어버리고 거기다가 쌀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밥을 해서 주거든요. 그래 변도(도시락)도 그걸 싸 줍니다. 그래서 그걸 먹어라고. 먹고 나면 어쨌는지 압니까? 설사를 해가지고 형편없습니다. 그러다가 앓다가 죽은 사람도 있고 고생을 하다가 낫는 사람도 있고 이랬는데 그래서 그 북해도 탄광 안에서 말이여, 조선에 좀 공부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죠. 모집을 안 오니까 말이여, 학교 가다가 책보자기 맨 채로 그냥 잡혀 온 사람이 있습니다. 대학에 다니다가, 서울대학 다니다가 말이여, 가방 들고 가다가 그냥 잡혀 온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이 그 안에서 우리 동포들 다 모아놓고 한사람 한 사람 다니면서 자 대우 개선하자! 밥을 정식적으로 먹여라! 반찬도 제대로 달라! 그래서 잠자는데 이불도 까는 이불도 주고 위에 담요도 달라! 그래서 목욕도 1주일에 두 번씩 꼭 시켜라! 이런 요구조건을 냈습니다. 그래도 안 된단 말이여. 너희는 여기 우리나라를 위해서 일하러 왔는데 그런 호화로운 생활은 안 시킨다고 말이여.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자 그러면 조선에서 데리고 올 때에 그때 그 당시 조선총독부입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라고 하는 건 모르지? 조선총독부하는 놈은 말이여, 눈을 부리시고는 길가에 가는 아이들이 겁을 준단 말이여, 그런 어마어마한 놈이 조선에 와서 총독부를 했단 말이여. 그래서 뭐 여기 일본 도로에도 그 놈의 사진이 나와 하지만은 ‘미나미’라 하는 놈이 총독부 가있었는데 그 놈이 아주 나쁜 놈이었어. 그 다음에 또 좋은 놈이 오는가 싶었는데 ‘데라우치’라는 놈이 더 나쁜 놈이 왔단 말이여. 그래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피를 빼먹었단 말이지. 탄광에 우리가 잡혀 와놓으니까 말을 못 한단 말이여, 그때에 너희가 약속을 할 때에 2 년 반이면 자기 고향에 돌려보내준다고 약속을 하고 왔는데, 보내 달라 2년 반이 넘었다, 보내 달라... 그러니까 저 놈들 2년 반 더 해라 2년 반 지냈지만은 2년 반 더 해라고. 그래서 우린 간다, 안 간다고 싸움을 해가지고 그 유우바리 탄광에서 싸움이 터졌단 말이여. 그런데 2만 명 넘는 사람이 몽둥이 들고 나서가지고 그 탄광에 있는 탄광주하고 거기 감독들 하고 거기 경찰서가 있었습니다. 경찰서 서장으로부터 해서 순사를 까지 다 묶어가지고 탄광 안에 잡아넣었단 말이여. 그래서 다른데 전화 연락 못 하게 전화선 다 끊고 그래가지고 우리가 투쟁을 했습니다. 투쟁을 하다가 또 잡혀 들어가지고 고생, 고생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때 죽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경찰서 가서 뚜들겨 맞아서 죽은 사람이 있단 말이여. 그래도 우리는 뚜드려 맞고도 다행히 살아 왔으니까 괜찮지요. 그래서 붙들러 갔는데 38 명인가 39 명이 잡혀갔습니다. 갔는데 그중에서 8 명 죽고 한 10 명인가 12 명은 병신이 되어가지고 뭐 형편없이 돼가지고 해방이 된 다음에 자기 조국에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남은 사람들 또 다 간다고 가다가 일본에 여기 떨어지고 저기 떨어지고 했는데 그 사람들 대부분이 다 죽고 이제 두 세 네 명 살았는가? 그럴 거요. 북해도에서 내가 좀 알아보니까 북해도 동료를 통해서 이런 사람 있느냐? 있다고 그 한 두 명인가 세 명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우리가 억압과 천대를 받았는가? 밥도 못 먹었지요. 그래서 하다가 안 되면 죽을 각오를 하고 목숨을 딱 걸어 놓고 산을 넘어서 도망을 가고. 그러니까 이놈들이 도망가는 사람들을 뚜들겨 팰 때는 아주 심하게 뚜들겨 팬단 말이여. 잘못 하면 죽어 버린단 말이여. 그 탄광에 있다가 내 뺀 사람도 많이 있고, 내 빼다가 잡혀서 와서 죽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런 형편에서 탄광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때 북해도하고 말이여, 여기 지꾸호, 여기가 제일 조선사람들이 많이 끌려 왔던 탄광이 있는 지대이니까 여기서도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도 동무들과 같이 가가지고 실제 조사도 하고 얘기도 듣고 했지만은 많이 지금도 아직도 여기서 죽고 일본땅에 그냥 그대로 남아있는 사람들이 많죠. 자기 주소를 몰라 놓으니까, 보내지도 못 한단 말이여.

 

[질문]

그러면 이제 탄광 이야기를 쭉 하셨는데 학교 이야기로 돌아가서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민족학교를 세울 때 돈이 많이 들었을 거 아니에요. 그 돈을 어디서 구하셨고 학생들도 공부가 끝나면 밖에 나가서 쇳덩이를 얻어다가 팔아 다녔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대답]

학교 지을 때 이렇게 했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힘 있는 사람은 힘을 내고,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서 그래서 우리 마음을 전부 합쳐가지고 민족교육을 발전시키는 학교를 짓자, 크게 짓자! 이게 우리나라 구호입니다. 여기 우리학교 지을 때 학생들은 어떻게 했느냐면, 학생들은 말이여 밖에 나가가지고 구리쇠 (동선) 을 길을 다니면서 주워요, 주워가지고 모아가지고 그걸 고철집에 가서 팔아가지고 그걸 딱 모아 놨다가 학교 짓는데 학생들이 냈단 말이여. 학생들이 내고 그리고 어디 가다가 쇳덩이라도 널치면 아이들이 학교에다가 모아 놨다가 팔아가지고 학교에 내고. 어머니들은 어떻게 했냐면 직업안정소에서 일을 구해가지고 그날 300원은 받는단 말이여, 100원은 반찬 값 하고 그래 100원은 아이들이 가는데 공부 시키는데 비용을 좀 주자, 그래서 100원이 남을지 50원이 남을지 하여간 남는 거는 딱 모아 놨다가 학교 건설하는데 내자. 어떤 할머니들은 어떻게 했냐면 50원짜리 구멍이 뚫어져 있는 게 있는데 거기다가 줄을 끼어가지고 했는데 우리가 팔로 재면 한 5팔 되게 냈단 말이여, 그게 돈이 몇 천이 된단 말이여, 그것을 갖다 주었을 때 학교에서 그 돈을 안 썼습니다. 왜 그러냐면 이게 역사기록이란 말이지요. 그래서 그 할머니가 일본 전국에서 어머니 상을 받았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구리를 많이 모아가지고 학교 짓는데 돈이 그때 15만 원인가 얼마인가 벌었답니다. 그걸 주워가지고 학생들이 표창을 또 받았습니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은 다 자기가 돈도 없는데 말이여, 종이 쪼가리를 써가지고 내가 500만원을 내겠습니다, 하는 은행 테가타(수표)가 있어요. 약속 테가타 를 끊어 가지고 500만 꾼단 말입니다. 끊으면 이날에 내가 얼마 하겠습니다, 저 달에 얼마 하겠습니다... 그래서 딱 딱 자기 계산대로 해가지고 그걸 은행에 넣을 때 준단 말이여. 우리들도 말이여, 50만 30만 테가타 끊어가지고 그걸 넣을 때 주어야 된단 말이여, 은행에. 집에서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죽을 판이란 말이여... 그렇게 하면서 전부 다 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학교를 중단을 하고 모자라는 것은 돈 있는 사람한테 가서 설득을 해가지고 좀 더 내고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이여, 김종달 이라는 사람은 1억 오천만 원 냈는데 나중엔 모자라니까 이거 안 되겠다, 자기가 건설위원장인데 이래 가지고 안 되겠다 해가지고 이 분이 또 5천만 더 냈단 말이여. 그래서 상공인들 보고 나 이만큼 냈으니 너희도 내라, 이래가지고 그 빚을 가리는 그런 애국적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도 나라에서 표창을 받았어요. 그렇게 해서 학교를 짓고 학교를 운영하는 데는 뭐냐면 학생들 집에서 월사금이 가령 제일 첫 번째 250 원인가 300 원인가 월사금 그랬습니다. 그러면 그거 내고 부모들이 좀 힘 있는 사람은 자 그러면 내가 100 원 좀 더 내지, 그렇게 학교 운영에 내고 상공인들, 돈 많이 가지고 있는 장사를 잘하는 그런 사람들한테 한 달에 내가 50만 있으면 50만 내겠다. 30만이면 30만 내겠다. 이래서 학교에 남겨 주고. 그런 속에서 제일 우리가 큰 힘을 얻은 것은 뭐냐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 지금 말하자면 북조선에서 장학금과 교육원조비가 왔어요. 그때에 제일 첫 번째 올 때에 1억 5천만 원인가? 얼마가 왔어요. 그래서 매년 한 3억 정도 옵니다. 그 돈이 공화국이야말로 돈이 없어 가지고 못 먹고 산다고 하는데 그래도 참 일본에 있는 우리 학생들을 잘 키워 가지고 좋은 조선사람으로 만들어 달라, 이렇게 해서 학교가 곤란한데 돈을 보내주고 올해도 2억 3천 몇 백만 왔죠. 그것을 총련중앙 교육회에서 학교 있는데 마다 학생 수에 따라서 다 분배를 해 줍니다. 그래서 그거 하고 이제 악기를 사야 되는데 악기 살 돈이 없단 말이여, 그런데 참 마침 다행히도 돈 있는 사람이 이 악기도 사주고 저 악기도 사주고 하는데 그래도 모자란단 말이여. 그래서 공화국 성악부에서, 정부에서 악기하고 뭐 풍금하고 온갖 것을 다 보내 왔단 말이여. 지금 그거 악기가 전부 그거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나라의 혜택을 받으면서 공부를 시키고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또 선생님들도 방학이 들어가는데 급여가 없습니다. 학교가 이렇게 곤란하니까 우리가 학교를 돕고 학생들도 우리학교 많이 돕고 그렇게 설득 하고... 지금 뒤에 그림 있잖은가, 한 사람이 말이여, 천 엔씩 내는 운동을 하자, 학교를 운영하는데. 지금 그것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금년 4월 달 부터서 6월 달부터인가 우리 학교 선생들이 월급을 제대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힘이라는 게 무궁무진 합니다. 알겠습니까? 동무

 

[질문]

민족학교는 학력인정도 안 되고 학비는 따로 내어야 된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자식들을 민족학교에 보내는 재일동포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대답]

재일 동포들은 역시 우리말 우리글을 가르쳐 가지고 훌륭한 조선사람으로 만들자, 우리말과 우리글을 안 배우면 조선사람이 아니다, 민족이 아니다. 말도 모르고 글도 모르는데 우리 민족이냐, 이거야.

그래서 대부분 여기 우리학교에 보내는 사람은 말이여, 참말로 나라를 사랑하고 조직을 사랑하고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학교 보내는 겁니다. 우리학교에 자식을 보내는 재일동포들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보냅니다. 알겠습니까.

 

 

4. 내가 만난 재일조선인을 통하여 느낀 점

 

이젠 어느덧 연구보고서의 마지막 단계인 결론에 들어서게 되었다. 나는 이 보고서를 쓰면서 참 많은 것을 느꼈다. 재일조선인, 그 분들이 살아오신 과정들을 독자 분들도 다 잘 보았으리라 생각한다.

 

1세분들의 한마디

 

“내가 우리말도 잘 하지도 못하고 일본말도 일본에 오래 살지만도 일본말도 잘 못하고 이렇게 하지만도 듣는 너희들이 잘 듣고 이해하고 이렇게 하면 좋다고 생각을 한다.”

 

“오늘 여기저기 다니면서 보고 느끼고 하는 이런 것을 토론도 해가지고 과거 역사를 되풀이 안 한다, 그러한 생각으로써 이 애들에게 교육으로써 가르쳐 주면 더욱 더 고맙겠소.”

 

“그래서 이 당도 우리는 오래오래 그러니까 일본하고 조선반도하고 제일 가운데 여기에 이 무궁화당을 거점으로 해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우호친선, 재일동포들의 권리옹호 이런데 대해서도 크게 기여할 수 있도록 지켜나갈 것이요”

 

“그래서 돌아가면 이런 일이 두 번 다시없도록 너희가 말이여, 공부도 잘하고 이렇게 해 가지고 <적>들에게 대항해서 나라를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된다.”

<배래선 할아버지 증언 중에서>

 

 

“일본에서는 그렇게 독하게 한 걸 몰라요” <편옥분 할머니 증언 중에서>

 

 

“재일동포들은 역시 우리말 우리글을 가르쳐 가지고 훌륭한 조선사람으로 만들자, 우리말과 우리글을 안 배우면 조선사람이 아니란 말이여, 민족이 아니다. 말도 모르고 글도 모르는데 우리 민족이냐, 이거야. 그래서 대부분 여기 우리학교에 보내는 사람은 말이여, 참말로 나라를 사랑하고 조직을 사랑하고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가지고 학교에 보냅니다.”

 

“지금 제일 큰 문제는 일본에서 우리 아이들이 있잖아요. 여기 일본학교에 보내자고, 사람들이 일본사람 만들자고 자꾸 하고 있단 말이여. 그러니까 우리 학교를 더 발전시켜야 된단 말이여. 그래 가지고 우리학교에서 공부 시켜야 조선사람이 되지, 그거 아니면 잘 하면 다 일본사람이 된단 말이여. 이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학교를 지어가지고 제일로 희망한 것이 통일이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커가지고 우리 뒤를 이어서 통일해야겠다. 우리시대는 좀 멀리 됐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아주 어린이들이 빨리 커서 이 아이들이 나라의 기둥이 되고 조직의 기둥이 되고 이렇게 해주어야겠다는 그 희망이 컸죠. 그 희망을 따라서 오늘까지 우리가 늙어들었단 말이여. 그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지금도 우리가 우리학교 학생들을 학교로 보내주고 운영을 잘하고, 학교가 그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때 모여 가지고 상의하고 있습니다.”

<조종태, 김광배 할아버지 증언 중에서>

 

나는 이 분들의 이 말씀들을 들으면서 참으로 정말 이 분들이야 말로 누구보다도 조국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또한 통일을 바라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재일조선인 분들이 이렇게 고생을 하고 또 우리말과 글을 지켜오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쳤는데 반대로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우리말보다는 외국어를 더 잘하려고 하는 학부모들이 많다는 것, 그리고 정부에서 조차 재외조선인의 역사에 대해서는 조금도 가르치지 않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한국에서도 재일조선인을 비롯한 재외동포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 의무교육 중 하나가 되었으면 한다. 이것은 내 친구의 말인데 평화는 어렵고, 전쟁의 불길은 계속 세차게 번지고 있다. 나는 안성신문의 청소년기자로서 재일조선인에 대해서 많은 신문기사를 써 내려고 한다. 이 분들의 증언을 앞으로도 계속 잘 보존하여 역사에 기록물로 남기려고 한다.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하자!

 

 

참고문헌

재일조선인 그들은 누구인가」(삼인)

아힘나, 재일코리안 1세들의 삶과 만나다” 인터뷰 테이프 (아힘나평화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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