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질>

어른들의 옛 이야기 속에는 가난한 시절의 고단함도 있고 억척같이 삶을 가꾸어온 강단도 있고 그 와중에 서로를 위하던 속깊은 정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옛 이야기를 듣다보면 가끔씩 튀어나오는 깊은 상처의 흔적을 만나게 됩니다.
이번 귀향에서도 어르신들은 한 보따리 이야기를 풀어 놓았습니다. 이번 이야기의 주제는 한국전쟁이었습니다. 어르신들의 단골 메뉴 중에 하나죠. 벌써 60년이 넘은 이야기지만 너무도 생생하게 재연되는 당시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당시 사람들에게 전쟁은 얼마나 커다란 충격이었으며 상처였는 가를 알게됩니다.
강원도 평창의 반정리는 원주와 강릉을 오가던 옛 어른들이 걸음 수를 재서 그곳이 딱 절반의 거리라고 해서 이름지어진 곳입니다. 지금은 대관령에 터널이 뚫려 강릉이 더 가깝지만 옛날 걸음걸이로는 절반의 거리에 있는 마을이었지요.
그 마을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평창강 줄기가있고 그 강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꽤나 유명한 유원지인 금당계곡이 나옵니다. 지금은 그쪽으로도 길이 잘 뚫려 있지만 옛날에는 깊은 산골로 사람이 드나들이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반정리 사람들이 그곳으로 피난을 가고 거기 동굴에 숨었다고 합니다. 개수 말고도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조지미 등등 여러 깊은 골짜기 이름도 등장합니다.
전쟁의 와중이라 모든 이야기들의 바탕에는 두려움이 깔려있기에 마련이나 그 와중에도 잔잔한 따뜻한 이야기들이 있기도 합니다. 피난처에서 동굴속에 짚을 깔고 이불을 가져다주어 얼어죽지 않도록 도움을 주었다는 심노인의 이야기도 있고 굶어죽지 않기 위해 음식을 나누어 먹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스통할배들이 들으면 기겁을 할 이야기이지만, 처음에 밀고 내려온 인민군은 민간인들에게 전혀 해꼬지를 하지 않고 착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앳띤 얼굴에 싹싹하기 그지 없었다고 하구요. 그에 비해 나중에 밀고온 국군과 미군은 무서웠다고 마을의 집들에 폭격으로 집이 불타는 것을 산 봉우리에 올라서 내려다 보았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특히 미군은 젊은 새댁을 보면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군침을 흘리곤 하여 젊은 여자들은 모두 얼굴에 숯 검정칠을 하고 뒤방에 숨어 얼씬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헌병대를 쫓아다니던 작은 아버지는 피난처에 숨어있던 큰 아버지들을 헌병의 위세를 업고 안전하게 모셔왔다는 이야기도 한 토막 나오고...
이렇게 전쟁의 이야기는 해마다 한 번씩은 반복됩니다. 한 분이 이야기를 하면 다른 분이 추임을 넣고, 불확실한 기억은 또 작은어머니나 큰어머니들의 기억으로 구체적인 모습으로 바뀌게 되지요.
그런 이야기를 듣던 중 이번에는 제 국민학교 친구의 할아버지가 목숨을 잃은 사연을 들었습니다. 산골마을 가난한 시골에서도 한문에 밝고 늘 품위를 잃지 않으시던 선비풍의 할아버지는 의용군이건 국군의 사역이건 끌려가면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이 들어서 동네의 아이들 중에 지금으로 보면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나이의 어린 총각들을 은밀히 숨겨 피난을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할아버지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어서 인민군을 따라 의용군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결국 한명도 살아오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국군을 따라간 사람들 중에도 목숨을 잃은 사람이 적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은 거지꼴을 해가지고 겨우 살아 돌아왔다고 하지요.
그 할아버지를 누군가가 손가락질을 했다고 합니다. 국군이 들어와 빨갱이를 색출한다고 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자 누군가 은밀하게 손가락을 가리켰고 손가락 끝에 있던 할아버지는 바로 끌려가 현장에서 사살되었다는... 그 손가락 질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구덩에에 가득한 것을 밤에 몰래 모셔다가 장례를 치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친구의 아버지가 왜 어려서 술을 드시면 누군가에게 욕설을 퍼붓고 가끔 눈물을 흘리셨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웃의 고발로 부친을 잃게된 자식의 아픔이 아련하게나마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 손가락질의 주인공은 옆마을에서 비슷한 일을 하다가 누군가의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고 하지요.
나라 전체로 보면 커다란 힘의 관계들이 있고 그런 내용들은 어려서부터 배워왔던 교육과 또 수많은 영화들을 통해 우리에세 공식처럼 차지하고 있어 아직도 우리의 두뇌속에 북한 사람들은 똘이장군에 나오는 늑대의 모습이 겹쳐지기는 하지만, 시골사람들이 가진 전쟁의 기억을 들여다보면 선과악의 모습은 뒤죽박죽이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 깔려있는 비극적인 슬픔들...
제 할아버지는 아버지들에게 늘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학교 수업을 듣다가도 비행기 소리가 들리면 바로 빠져나와 개울가로 숨어서 집으로 돌아와라" 슬하에 8남매를 두고 손주들까지 있는 가장으로써는 그어떤 커다란 이념보다 가족의 생존이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전쟁의 기억들 속에 깔려있는 이 시골마을 사람들의 가장 큰 바탕에 깔려있는 주제 또한 그 생존이었습니다. 친구의 할아버지도 제 할아버지도 모두 가족과 이웃들이 살아남기만을 바랬을 뿐인데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빨갱이'가 되고 '인민의 적'이 되기도 했던 비극적인 전쟁이었습니다 .
60년 전의 그 아픔에 있던 많은 이들이 이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많이 않지만 지금도 누군가에게는 그 생존의 몸부림이 '좌익'이 되기도 하고 '용공'이 되기도 하는 것을 보면 60년이 더 지난 2012년의 대한민국이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전쟁의 기운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보입니다. 분단의 논리에 기댄 손가락질이 아직도 곳곳에서 누군가를 지목하는 것을 봅니다.
대선의 기간에 더이상 이런 손가락질이 이웃에게 향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만, 벌써 한 후보와 그 후보의 측근들은 NLL이다 뭐다 손가락에 힘을 주고 있다고 하지요. 참 징글징글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뽑히지 말기를...
그리고 세상을 떠난 이들이 그곳에서 "어서오시게~" "먼저 왔는가?" 서로 얼싸안고 환한 웃음으로 춤을 추시기를 기원합니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아우내마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