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힘나평화학교 역사 교사 - 김강산

 
 
 
 
역사 선생님, 시민단체 사무 간사
 
“어릴 때부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풀무농업고등 기술학교를 다닐 때 좋은 선생님들이 너무 많아서 ‘내가 저렇게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거든요. 
다시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로 돌아가 제가 배운 것들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었어요. 
그래서 대학을 선택할 때 교직이 개설되어 있는 과를 찾다가 사학과를 선택하게 되었고요. 
대학에 입학해 공부를 하면 할수록 역사에 흥미가 깊어졌어요.”
 
2007년, 김강산 씨가 대학교 1학년이 되던 해였다. 
교육자인 아버지가 학생들을 데리고 일본 관동지방으로 캠프를 떠나게 됐는데, 그때 김강산 씨도 함께 갔다가 그곳에서 역사 강의를 해주러 오신 할머니를 만났는데 90세 가까이 되신 일본 분이었다. 
그분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목격하신 분으로 그 당시의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아버지도 그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1923 한일재일시민연대’다. 
그곳에서 사무 간사를 맡고 있는 그는 이 단체를 만들면서 민족문제연구소 실장님을 만났고 그 인연으로 민족문제연구소에 들어가서 친일인명사전을 만드는 등 활동을 함께 해왔다.
 
1923년 일본 관동지역에서 일어난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은 무려 6천 명. 
그러나 그 사건에 대해 아직까지 진상규명이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연구는커녕 추모 활동조차 이루어지고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만든 단체가 ‘1923 한일재일시민연대’다.
 
현재는 진상 조사를 할 수 있는 특별법을 국회에 발의한 상태고 그 법안이 통과되도록 최선을 다해 활동하고 있다. 
그는 시민단체 일을 하면서 과거사 문제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공부를 더하고 싶다는 생각에 대학원 입학을 선택한 김강산 씨는 현재도 일본 관동지방을 중심으로 학생들과 함께 하는 답사와 캠프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공부 잘하던 중학생, 대안학교에 가다
 
김강산 씨는 공부를 잘하는 중학생이었다. 
광주 시내에 광주고등학교가 생기면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모두 광주 시내로 나가기 바쁜 시기에 부모님이 갑자기 그에게 대안학교를 권하셨다. 
친구들은 다 광주고등학교에 입학을 하는데 농업고등학교에 가라고 하는 아버지의 말씀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처음에는 경운기와 트랙터가 지나다니는 시골길에서 학생처럼 보이지도 않는 사람들이 서로 ‘맑았습니다’, ‘밝았습니다’라며 이상한 말로 인사하는 것을 보고 황당했어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일주일 만에 사라졌습니다. 
학교생활이 재미있었고, 제가 생각한 고등학교는 아니었지만 제가 바라는 고등학교의 모습이었으니까요.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았고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기 때문에 굉장히 좋았어요.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선배들과 어울리며 살아본 것도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고, 역사를 공부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던 동아리활동도 재미있었어요.”
 
학교 전체 인원이 70명이었는데 동아리 소모임이 30개 가까이 되었다. 
그도 4~5개의 동아리에 참여하면서 쉴 틈 없이 재미있게 학교생활을 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지만 시험 날만 되면 배가 아플 정도로 예민한 성격으로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던 그였는데, 정작 대학입시를 앞둔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늘 대학교는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교를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농어촌특별전형, 대안학교 특별전형, 자기 추천 등, 저는 어디로든 뚫고 들어갈 자신감이 있었어요.”
 
좋은 학교를 나오지 않았어도 좋은 삶을 사는 어른들
 
“저에게 ‘좋은 대학교’에 대한 개념이 없었어요. 
공부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고 고민한 적은 없죠. 
부모님이 살아 오신 과정을 봤기 때문이에요. 
부모님은 좋은 학교를 나오지 않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풀무농업고등기술 학교 선생님들도 마찬가지로 좋은 학교를 나온 건 아니지만 제가 존경할 만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좋은 대학교를 가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김강산 씨의 부모님은 신학대학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민중신학을 바탕으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운영하면서 사회문제, 역사문제에도 관심이 많은 분이었다. 
대학교 시절에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에 답사를 왔다가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좋은 인상을 갖게 된 그의 부모님은 학교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계셨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에 보내고 몇 년 후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를 모델로 아힘나평화학교를 세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부터 어머니와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어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을 충분히 받아주셨고 저 역시 부모님들의 의견을 다 듣고 나서 대학교, 대학원 진학을 결정했죠.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에 가라고 했던 청천벽력 같은 권유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대안학교의 추억
 
김강산 씨가 대안학교에 다니는 동안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체생활을 하면서 생기는 마찰들도 있었고 저녁모임 시간에 서로의 의견을 이야기하다가 흥분해서 주먹다짐이 오가기도 했다. 
선후배 관계에서 군기를 잡는다고 해서 한때 ‘때리는 문화’가 전해 내려오기도 했다.
 
“저희가 닭을 키우는데, 새벽에 닭을 잡아서 닭볶음탕을 해먹고 경운기 타고 피시방에 간 전설적인 선배들이 있었죠. 
대안학교에도 부조리한 규칙들이 많았어요. 
이성교제를 금지하고 여름에도 반바지를 못 입게 하고 보수적인 면들이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고등학생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돌이켜보니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았던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동아리 활동으로, 그 당시에도 상당히 수준 높게 진행되었던 편이었지만 ‘더 잘했더라면 더 많은 고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가 역사동아리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주제가 근현대사에 집중이 되어 있었고 실제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이라크 파병문제, 김선일 씨 피랍사건, FTA 쌀 개방문제 등, 또래의 인문계 고등학생들은 입시 준비 때문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사회문제에 대해 인식하고 고민할 수 있었다.
 
“「녹색평론」이라는 잡지를 처음 읽었을 때는 개화기 때 신문을 처음 접한 사람처럼 ‘정말 이런 생각도 해? 이런 사람도 있어?’ 하면서 놀라기도 했어요. 
국어선생님이 글쓰기도 많이 시키셔서 대학에서도 대학원에서도 많은 도움이 됐어요. 
글 쓰는 과정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입시준비를 할 때도 두려움이 덜했던 것 같아요.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자신감을 갖고, 많이 경험하고 많이 생각하세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역사 선생님이 기타 치는 것을 좋아하셔서 기성곡에 가사를 바꿔 노래를 부르시곤 했어요. 
뒤 운동장에서 민중에 관한 노래나 녹두장군 전봉준 노래를 기타 치며 부르시던 모습이 굉장히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는데 우리 아이들은 비인가 학교라서 검정고시를 봐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교과 중심으로만 가르치는 것 같아서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김강산 씨는 현재 박사 과정 공부 중이라 역사 수업 이외에는 아이들과 함께 생활할 여유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빨리 공부를 마치고 학교가 있는 마을로 돌아갈 생각이라고 했다. 
마을로 내려가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것 외에도 마을 주민들에게 마을 역사를 기록해보도록 하거나 함께 현장을 답사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기획하면 마을주민들과도 함께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아이들은 고민이 굉장히 많아요. 
하지만 그 고민들이 대부분 막연한 것들이죠. 
하고 싶은 것이 명확하면 그것을 향해 한 단계씩 밟아나가면 되는데, 우리 사회가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돼 있잖아요. 
아이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지 않고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라고 하는 어른들도 문제예요.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든가 ‘하고자 하는 일’에 자신감을 갖는 것이에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당장은 할 수 없더라도 끊임없이, 조금씩 시간을 투자하고 생각과 경험을 늘려가다 보면 어느 정도 꿈이 구체적으로 그려져요. 
고민을 즐기면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면 돼요.”
 

■ 관동 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사건 ■

 

1923년 일본에서 발생한 대지진의 수습 과정에서 조선인들에 대한 유언비어가 조장되어 조선인 대량 학살로 이어진 사건.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일본 간토(關東)지방에 매그니튜드 7.9, 최대 진도 7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은 대규모의 화재와 해일, 토네이도로 이어지며 도쿄의 60%, 요코하마의 80%를 파괴했다.

 

일본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이 지진으로 사망자 9만9천331명, 행방불명 4만3천476명, 가옥 전파(全破) 12만8천266동, 반파(半破) 12만6천233동, 소실44만7천128동, 유실 868동의 피해가 발생했다.

 

그런데 지진 다음날 발족한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 내각은 흉흉해진 민심을 잡기 위해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내각은 ‘조선인이 방화를 하고,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집어넣었다!’, ‘조선인의 배후에는 사회주의자가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시키고 이것을 구실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 때문에 유언비어가 기정사실화됨으로써 일본인들은 대대적인 조선인 사냥을 시작했고 전국적으로 조직된 3,689개의 일본인 자경단(自警團)이 조선인들을 학살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인에 의해 살해당한 조선인의 숫자는 가장 보수적인 통계에 의하더라도 2천500명이 넘고, 문헌에 따라서는 6천명에서 1만 명을 넘어섰다.

 

일본 정부는 이 혼란을 조선인들에게 우호적인 좌익 세력을 뿌리 뽑기 위한 기회로 삼아, 노동운동가 히라사자와 게이시치(平澤計七), 사회주의지도자 오스

기 사카에(大杉榮) 부부 등 일본의 진보적 인사 수십 명을 검거해 살해했다.

 

한편 일본은 간토대지진이 발생한 9월 1일을 ‘방재(防災)의 날’로 정해서 재난재해에 대한 대피훈련을 실시해오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간토대지진(관동대지진) 학살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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