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순 | 한국정신대연구소 소장

 

 

ㆍ‘국가배상 아닌 위로금’ 日정부, 자국민에 가해책임 떠넘겨한국을 비롯한 각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이 2007년 3월 말 12년간의 사업을 마치고 해산했다. 한국·대만·필리핀 3개 지역에서 피해자 285명에게 기금을 지급했다고 하지만, 기금의 지역별 지급상황이나 피해자 신상은 극비사항이어서 공개할 수 없다고 버텨 자세한 내용은 지금도 알 길이 없다.

 

 

1997년 1월15일 서울 중학동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김은례 할머니가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반대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외견상 한국·필리핀·대만·인도네시아·네덜란드 등의 피해자들에게 위로금과 복지지원금을 지급하거나, 노인홈 건설사업도 추진한다고 했다. 중국과 북한은 배제됐다. 국민기금은 종료됐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하 피해자)들에게 남긴 상처와 폐해는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특히 한국과 대만에서 국민기금을 거부한 피해자가 가장 많아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는 분석이 일본 내에서도 나오고 있다.

국민기금은 1995년 7월19일, 일본 외무성이 관할하는 정부의 외곽단체로 출발했다. 당시 국민기금은 “일본군 위안부였던 피해자에게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한 일본 정부가 국민과 협력해 위로금 사업을 하기 위함이다. 그 위로금 사업이란 일본 정부와 국민이 협력하여 위안부였던 분들에게 사죄와 반성을 표시하는 일이다”라고 설명했다.

국민기금이라고 하나, 기금을 운용하고 유지하는 일체 경비는 정부예산으로 집행하고, 단지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위로금만 국민 성금으로 집행한다고 했다. 여기서 왜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돈의 성격이 국가보상이 아닌 국민의 위로금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국민기금은 가해 주체를 애매하게 만들어 일본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문과 함께 피해국들 사이에서 일제히 국민기금 반대 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국민기금 측은 97년 1월11일 한국의 피해자 7명에게 비밀리에 기습적으로 기금 지급을 단행했다. 피해자들이 받은 돈은 1인당 500만엔으로 위로금 200만엔과 의료, 복지지원금 300만엔을 합한 금액이다.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배상이 아닌 민간 모금으로 만든 국민기금을 일부 피해자에게 지급했다는 뉴스를 들은 피해자 대부분은 분노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같은 달 15일, 한·일 외무장관회담에 참석한 한국의 유종하 외무부 장관은 유감 표명과 함께 지급철회·기금지급 중단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유엔과 국제노동기구(ILO)에서도 국민기금은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될 수 없다며 일본 정부가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을 하라고 촉구했다.

이처럼 피해국들이 큰 반발을 한 일본군 위안부 보상 문제가 일본 국내 사정도 바꾸기 시작했다. 90년 냉전체제 해체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 김학순 할머니의 전면 등장은 일본이 전후(戰後) 역사인식을 새롭게 하는 전기를 제공했다. 프랑스와 독일도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계는 ‘전후’라는 물음으로부터 역사인식의 전환기를 맞이한 셈이다.

자민당 정권은 92년 ‘보상을 대신할 어떤 조치’로 위로금을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기금창설방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당시 야당인 사회당에서 전후보상은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 성실한 사죄와 보상으로 해야 한다며 기금 구상안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94년 6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사회당 당수가 자민, 사회, 사키가케 3당 연립 내각의 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92년부터 기금안을 그처럼 반대했던 무라야마 총리는 ‘평화우호교류사업’과 ‘민간모금기금’ 등의 기금안을 속속 발표하면서, 위안부 피해자에게는 “국가로서 개인보상을 할 생각이 없다”는 정부의 입장을 고수했다. 무라야마 총리는 야당 시절의 전후보상안을 외면한 채 국민기금에 정부지원을 약속하고 기금안을 채택하고 말았다. 무라야마는 결국 ‘기회는 위기일 수도 있다’는 진리를 각인시켜주었다. 이러한 무라야마 총리의 변신을 되새겨보면 과거 전후보상에 오랫동안 관심을 표명하던 하토야마 유키오 현 총리에 대해서도 우리는 결코 낙관할 수 없다. 진정 그는 무라야마 총리와 달리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바른 입장을 유지해 나갈지 의문이 든다.

1996년 3월 28~29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4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피해자와 피해단체 참가자들이 ‘우리는 왜 아시아여성국민기금을 반대하는가’를 주제로 토론을 벌이고 있다.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제공


일본의 일부 학자나 연구자들이 국민기금에 느끼는 분노와 절망은 반성과 책임이라는 차원에서 비롯한다. 일본이 시대와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고 있다는 자탄이 우선 그렇다. 침략전쟁에 대한 가해책임을 극복하고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기회를 일본정부가 스스로 버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미 95년과 96년에 프랑스와 독일에서 피해자에 대한 국가책임과 개인배상의 길을 열고 있는 것과 달리 일본은 왜 국가책임을 회피하는 국민기금을 만들고, 피해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금 지급을 강행하고 있는지 착잡하고 우울하다고 했다.

피해자들과 함께 국민기금 반대운동의 일선에 있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는 96년 10월 ‘한겨레 21’과 더불어 피해자 지원을 위한 범국민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한국이 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로 들어가면서 모금운동도 순조롭지 못해 애초 모금 목표였던 60억원 가운데 12억원밖에 모으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정대협이 모은 국민성금에 정부예산을 추가해 98년 5월부터 피해자에게 1인당 생활안정지원금으로 일시금 4300만원을 지급했다. 반면 국민기금을 수령한 피해자에게는 지원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지원금을 지급하면서 피해자들에게 국민기금을 수령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았다.

피해자 대부분은 당시 국민기금을 받지 않겠다는 정부와의 약속도 지켜야 하고,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국민기금 받지 말자’는 결의에 동의하고 결심도 굳혔다고 한다. 그러한 피해자들 사이로 국민기금 관계자들이 물안개처럼 스며들어 물밑작전을 강행하기 시작했다. 집요한 회유를 이기지 못하고 위로금을 받아 공익재단에 기부한 한 피해자는 국민기금과의 어둡고 긴 관계를 털어놓으며 오랫동안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그리고 모르는 일로 해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남겼다.

그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후미에’가 떠오른다. 후미에는 ‘그림을 밟다’라는 일본말이다. ‘크리스천 사냥’이라고 불리며, 일본 에도막부의 천주교 박해사를 상징한다. 후미에는 천주교 신자를 색출해 내는 데 쓰던 방법으로 교활하고 잔인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었다. 예수나 성모 마리아 그림이 있는 판을 밟도록 명령한 뒤 그 반응으로 신자를 찾아내 죽이거나 배교시켰다. 자신이 신자라고 고백하고 순교자의 길을 선택한 사람도 많았다. 문제는 배교도 못하고 후미에를 밟은 뒤 비밀스럽게 살아남은 사람들의 비애와 고통이다. 국민기금은 피해자에게 ‘위로금’이라는 후미에를 밟게 했다.

국민기금 발기인인 와다 하루키 도쿄대 교수는 국민기금을 비밀리에 집행하는 이유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운동단체의 반대 때문이라고 변명한 바 있다. 이러한 와다 교수의 발언이야말로 국민기금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일본 정부는 사죄와 배상 불가론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일본 국민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인권 유린에 공감해 위로금 모금 운동을 전개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국민이 가해 책임을 대신할 수는 없다. 가해 책임은 가해자의 진정한 사죄와 배상이 전제돼야 한다. 일본은 패전 후 ‘일왕’의 전쟁책임을 국민이 대신했던 예가 있다. ‘1억 총참회론’이 그것이다. 1억 국민이 패전의 책임을 몽땅 참회하자는 것이다. ‘일왕’과 정부에 전쟁 책임을 물어야 할 국민이 ‘천황제’ 유지를 위해 ‘일왕’과 정부에 면죄부를 준 셈이다.

그때 식민지 지배 책임과 전쟁 책임을 묻지 않았던 게 전후 6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일본이 왜곡된 아시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웃나라들과 역사 전쟁을 벌이고 있는 원인이 됐다. 결자해지의 원칙에 따라 전후보상에 임하는 것이 일본 정부의 도리다. 국민기금이 실패한 원인도 원칙을 무시한 시나리오였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직접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배상하는 길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그것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내세우는 일본 민주당 연립 정부의 급선무다.

 

 

■ 한국정신대연구소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조사·연구…입법운동·서적출판 활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조사·연구하는 단체다. 1990년 7월 창립됐다. 중국 전역과 일본 오키나와 해남도 등에서 위안소와 위안부 피해자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피해자 구술자료 정리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입법운동도 벌이고 있다.

학교·단체 출장 강의, 교육자료 출간 자문, 관련 세미나 개최, 피해자 방문 활동도 진행하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 면담과 증언채록을 통해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1993년)을 비롯해 국내편 4집, 중국편 2집 등 모두 6편의 증언집을 출간했다.

2000년에는 문답집 <할머니, 군위안부가 뭐예요?>를 펴냈다. 국외거주 일본군 위안부 실태 조사(2002년), 중국에 남아 있는 피해자들의 국적 회복 사업(2005년)을 벌인 결과 중국 현지 피해자들이 한국 정부의 생활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 밖에 피해자 간병인법안 등 관련법 개정안에 대한 자문도 해왔다. 2006년 이후 <배봉기의 역사이야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봉기 구술자료집>, 한·일 공동세미나 자료집 <강제성이란 무엇인가> 등 각종 관련 서적도 내놨다.

■ 글쓴이 이성순은

이성순 한국정신대연구소 소장은 일본의 과거사 입법 해결을 위한 지원 활동과 위안부 피해자 구술자료 정리 작업을 맡고 있다. 독립기념관 위안부 피해자 전시관 자문위원, 여성가족부 일본군위안부피해자심의위원회 위원,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1989년 나가사키에서 조선인 피폭자 면담을 시작으로 식민지 범죄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일본 침략전쟁, 원폭피해, 강제동원, 식민지 범죄 자료 수집과 조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일본대 문예과를 졸업한 뒤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를 수료했다. 번역서로 <깊은강>(엔도 슈샤쿠) <전쟁책임과 젠더>(스즈키 유코·공역) 등이 있다.

 


<경향신문·국치100년사업공동추진위원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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