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주의 청산과 동아시아의 평화로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하여

『한국강제병합』100년 - 식민주의 청산과 동아시아의
 평화로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하여
 
이석태
(진실과미래, 국치100년사업공동추진위원회 상임공동대표)
 
기조발제 : 이석태공동대표
올해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금년 우리는 새로운 자각 속에 한 해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특별한 해 1월의 마지막 날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들이 여기 모였습니다. 이 모임은 식민주의를 완전히 청산하고 한일을 넘어 동아시아의 평화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 서로의 지혜를 모으고 실천을 모색하는 자리입니다. 이 의미 깊은 자리에 ‘진실과미래, 국치100년사업공동추진위원회’를 대표하여 먼저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1. 식민주의의 긴 역사
 
식민주의는 500년이라는 긴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에 발을 들여놓은 때부터 시작된 식민주의는 16세기 초반에 스페인 군인들이 중남미 지역을 침략하여 정복함으로써 궤도에 올랐습니다. 그 무렵 포르투갈은 아시아 무역에 참여하며 곳곳에 무역거점들을 만들었으나 본격적인 식민화의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17세기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북아메리카 지역의 식민화를 시작했습니다. 식민주의가 본격화한 것은 1757년에 영국이 인도의 벵골 지역을 시작으로 인도 전체를 식민화하면서부터입니다. 1780년대에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이에 큰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산업화로 인해 가능해진 강력한 군사력이 세계의 힘의 균형을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19세기에 들어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식민지화는 가속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 제국 열강들은 전 세계 영토의 10분의 9를 점령했거나 다양한 수단으로 통제했습니다.
 
식민주의는 2차대전 후에야 끝나게 되었습니다. 식민지인들의 끈질긴 저항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한 유럽 식민국가들의 약화, 냉전체제로 바뀌는 국제정치의 흐름이 더 이상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식민지들, 종속적인 신탁 상태에 있지만 병합되지는 않은 영토들, 해외의 관할 구역들, 그 밖에 이러저러한 형태로 식민적 지위를 나타내는 이름들의 목록은 아직도 놀라울 정도로 깁니다.
식민주의가 남긴 역사의 상처는 너무나 큽니다. 세계적인 소수종족 보호단체인 「서바이벌」(Survival)은 2000년 5월 브라질 인디오들의 토지 소유 운동을 시작하면서 유럽인들의 브라질 도착 500주년을 환기시켰습니다. 『브라질: 저항의 500년』이라는 제목의 「서바이벌」 홍보전단은 저 ‘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의 착취와 학살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조명했습니다.
 
 “포르투갈인들이 브라질에 발을 디뎠을 때 5백만 명의 원주민이 있었다. 침략자들이 질병과 노예와 폭력을 들여와, 원주민들은 거의 절명했다. 오늘날 그들의 수는 33만 명이다. 원주민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토지에서 쫓겨나고 있고, 벌목꾼들과 정착민들과 채광꾼들과 유력한 기업의 수중에서 폭력과 질병을 겪고 있다.”
 
마찬가지로 백인들이 이주하기 전 1000만 명이 넘었던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은 이제 25만 명만 남았을 뿐입니다. 이처럼 500년의 역사를 가진 식민주의는 노예제의 역사, 억압받거나 방치됨으로써 셀 수 없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말해지지 않은 역사, 수백만 명에 달하는 피압박 민중들의 강제 이주와 이산의 역사, 영토와 토지 탈취의 역사, 인종주의 제도화의 역사, 문화파괴 등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식민지에서 정치적 해방을 맞은 국가들 또한 아직도 과거와 비슷한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무질서와 억압, 빈곤과 기아, 사회적 불평등, 문화적 예속 같은 문제들로 고통받고 있으며, 그것이 완화될 조짐은 별로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상당수 나라들의 경우 오히려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식민주의는 외관상으로는 사라졌으나 여전히 제3세계인들에게는 무거운 짐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식민주의가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의 자생적인 정치적, 경제적 발전을 가로막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조장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 창조성도 억눌렀기 때문입니다. 식민주의 초기의 정복과 달리 근대의 식민지배는 피식민지의 정치ㆍ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지배와 통제를 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식민주의는 정복을 통해 땅을 빼앗고, 그곳에 지배하는 쪽의 정치, 경제 및 사회질서, 나아가 그 시스템을 가동시킬 수 있는 지배층들을 정착시키는 행위이자 그것을 정당화하는 사고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피부, 인종, 민족이 다른 것을 이유로 착취와 수탈을 제도화한 체계이자, 문명화라는 이름아래 타민족의 문화를 파괴하고 억압을 정당화ㆍ합리화한 의식입니다. 그러한 의식은 피식민지 주민에게는 노예적 사고와 정체성 상실, 그리고 정신분열을 조장합니다. 문제는 현대와 같은 탈식민의 시기에도 식민주의의 시스템과 의식이 그 모습과 달리할 뿐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주의는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일본의 한국(조선) 지배와 식민주의의 유산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는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그것이 남겨놓은 폐해와 유산은 무엇입니까. 조선 고종 13년인 1876년 일본과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 조약’)가 체결된 이래 한반도에서는 자주적 근대화를 위한 정치적 개혁과 노력이 시도되었습니다. 그러나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군사적 개입과 간섭이 노골화됨에 따라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은 근본적으로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외교권을 빼앗는 한편, 내정을 간섭하였습니다. 이어서 1907년 헤이그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행정과 사법을 장악하면서 군대를 해산시켰습니다. 마침내 1910년 8월 22일 강제로 '한일합병조약'이 조인되고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문이 공포됨에 따라 한반도는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후 일본에 값싼 식량과 원료를 공급하기 위한 기지로 만드는 한편,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를 침략할 때는 병참기지로 만들었습니다. 이를 위해 일제는 모든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직접 지배를 추진했습니다. 특히 1937년 중국 침략 이후에는 한국의 언어와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동방요배와 신사참배, 창씨개명을 강요함으로써 민족문화까지 말살하려 했습니다. 중국 침략 이후 전쟁의 늪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일제는 마침내 한국인까지 전쟁의 총알받이로 동원하여 희생을 강요했습니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고 식민지배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인명 피해는 1993년 조선국제법학회(북한)가 유엔 등 국제사회에 보고한 자료에 따르더라도 최소한 다음과 같습니다.
 
- 동학농민군, 항일의병, 무장독립군, 그리고 정치운동 탄압 등으로 학살된 사람
   13만 9,600여명
- 국내에서의 혹사 등으로 사망한 사람 1만 9,900여명
- 수감 중에 학살된 자 9,900여명
- 식민지 통치에 기인하는 기타 사망자 12만 3,900여명
- 징용, 징병, 일본군'위안부'로 강제연행된 사람 71만 1,600여명
 
이 자료는 조선총독부 문헌 등 일본의 공식문서에 기초하여 정리한 것이어서 말 그대로 최소한의 통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한 동학농민군이나 의병의 경우, 일본군에 보고된 자료보다 최소한 4배 이상이 희생되었다는 것이 한국 국내 학계에서도 확인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매년 1만여 명이 넘는 정치범이 조선총독부의 감옥에 수감되어 고문과 탄압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머릿속의 사상까지 개조하겠다고 법과 제도를 만들어 숱한 피를 흘리며 획득한 양심과 사상의 자유라는 근대의 보편적 가치마저 완전히 폐기했습니다. 침략전쟁기에 구축된 이러한 파쇼적 지배체제는 일본이 패전한 이후에도 한국사회에 뿌리내려 냉전과 분단체제를 강화하는데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인해 1천만에 달하는 민중들이 고향을 떠나야했으며, 일본이 패전한 이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차별과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식민지배가 남긴 가장 큰 상처는 역시 남과 북의 분단입니다. 주변 강대국이 인위적으로 갈라놓은 38도선 때문에 남과 북이 전쟁을 치러야만 하는 비극을 겪었으며, 부모형제들이 지금도 이산의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에서 식민주의의 종식은 남과 북이 군사적 대치상태를 없애고 평화체제를 구축할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현재도 조일수교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이 부분은 별론으로 하고, 한일간에 식민지배가 남긴 상처와 유산을 청산할 기회는 한번 있었습니다. 1965년 한일협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한일 협정 과정에서 일본은 식민지배를 사죄하기는커녕 오히려 식민지배가 합법이며,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는 식의 '망언'을 일삼았습니다. 결국 한일협정은 이러한 일본의 주장을 극복하지 못한 채 단지 국교를 재개하는 수준에서 끝나고 말았습니다. 한국의 군사정권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가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을 끌어내지 못하고 정치적 타협에 그침으로써 한일간의 과거청산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점은 새삼 환기시킬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잘못된 조약 체결로 인해 일본군'위안부'를 비롯하여 강제동원피해자 등의 피해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일본정부는 이들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단 한 번도 성실한 자세로 귀 귀울이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피해에 대한 책임이 없으며, 한일협정으로 피해자의 권리는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식으로 피해자들의 사죄와 피해회복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예컨대 강제동원 당시는 일본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이지만, 패전 이후에는 일본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원호에서 배제하는 등의 반인권적인 모순된 정책으로 일관했습니다. 더욱이 전 세계가 한 목소리로 비난하고 있는 반인도적 전쟁범죄인 일본군'위안부' 문제조차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본제국과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도록 강요당해 희생된 한국인의 영혼조차 야스쿠니신사에 유폐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사기와 협박으로 어린 나이에 끌려간 여자근로정신대원, 전쟁의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도록 강요당해 BC급전범으로 판결받아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포로감시원들, 군인으로 끌려갔다가 전쟁 이후 버려진 시베리아억류자들, 강제징용 등으로 동원되었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할린 미귀환자들, 그리고 탄광과 비행장, 철도공사장에서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은 노동자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무참하게 학살당한 재일조선인 등 그 피해의 목록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식민지배가 끝난 지 50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에도 일본정부의 무책임으로 이러한 피해와 고통의 치유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최근 일본정부는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역사교과서를 검정합격시켜 미래세대에게 가르치고,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이었던 히노마루 게양과 기미가요 선창을 부활시켜 강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한국을 비롯해 식민지배를 당했던 주변 국민들에게 또 한번의 모욕과 가해를 가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권을 강탈하여 노예적 삶을 강요하고 침략전쟁의 소모품으로 동원하여 피해를 입게 한 행위가 '1차 가해'라고 한다면, 그러한 사실을 부정하거나 합리화시킴으로써 피해국민에게 다시 모욕을 가한 것은 '2차 가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그 배경에는 아시아에 대한 멸시의식 또는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이 작동하고 있다고 봅니다.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은 일본 근대사상가 후쿠자와 유기치가 주장한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에서 시작됩니다. 이 탈아입구론은 동아맹주론을 거쳐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침략적 이데올로기로 발전하였다가 결국 패전과 더불어 정치적 입지를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팽창을 주장하는 논리는 소멸되었지만 그 주장의 배경이자 뿌리인 아시아에 대한 멸시, 차별의식은 여전히 일본사회에 뿌리깊게 내려져 있습니다. 재일조선인을 비롯한 아시아인 이주노동자에 대한 제도적, 의식적 차별은 일본사회의 폐쇄성에서 기인한 것이라기보다 아시아에 대한 멸시의식과 차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올해 NHK는 일본의 국민작가라 불릴 정도로 인기가 있는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언덕 위의 구름』을 대하드라마로 만들어 방영하고 있습니다. 시바는 이 소설을 통해 이상을 추구하는 젊음, 영웅에 대한 갈망, 공동체에 대한 헌신, 강력한 국가의 건설 등을 그려냄으로써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습니다. 그렇기에 시바에게 러일전쟁은 건강한 국민국가, 건강한 내셔널리즘이 형성되는 전쟁으로 보였을 것이며, 긍정하고 싶은 메이지(明治)시대로서 '집합적 기억'이 만들어지길 원했던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욕망은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욕망과 맥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시바가 『언덕 위의 구름』을 통해 만들고 싶었던 '집합적 기억'은 강자의 기억만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조선의 주권을 침탈한 것이라든가, 주민을 위협하고 학살한 사실은 물론 전쟁으로 일본 민중이 입은 고통과 전쟁이 일본사회에 가져다 준 부정적인 결과 등은 배제되어 있습니다. 시바가 기억하고 싶고, 만들고 싶었던 러일전쟁 이야기 속에는 불행하게도 민중과 소수자의 시점(視點)은 물론 동아시아라는 시점이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일본사회가 진정으로 동아시아의 일원으로 평화와 공존의 세상을 함께 만들어나가고자 한다면 우선 이 아시아 멸시와 차별의식부터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3. 식민주의의 극복과 한일 연대의 강화
 
식민지배가 남긴 상처를 치유하고 식민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한일간의 연대는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분야에서 진행되어 왔습니다. 이 운동은 피해 회복을 요구하는 운동일 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두 사회를 바꾸기 위한 운동이기도 합니다. 피해자의 권리를 회복하는 길은 곧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하는 과정이며 국가폭력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고 민주화를 촉진하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김학순할머니가 치욕을 무릅쓰고 스스로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용기있게 밝힌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일간의 과거청산 문제에서 최대의 상징으로 제기되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 ‘천황’제라는 국가폭력에 의해 강요당한 식민지 여성의 노예적 삶과 반인륜적 성범죄, 그리고 억압적인 가부장적 질서하에서의 인권 박탈이라는 인간성 말살과 제국 일본의 폭력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이 문제는 반인도적인 전쟁범죄로서 세계에 인식되고 있으며, 나아가 '전쟁과 여성의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가치와 제도화된 국가 폭력을 정면으로 다루는 문제로까지 발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쓴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대한 한일시민사회의 연대 투쟁 또한 과거에 대한 반성을 넘어서서 일본의 양심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20세기 말부터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은 과거의 기억을 둘러싸고 안팎으로 똑같이 내전(內戰)을 치루고 있습니다.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 왜 지금 이렇게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양국에 공통된 현상으로 지금까지 쌓아올린 민주화와 평화, 인권에 대한 가치를 약화시키거나 부정하고 오직 강자의 논리로만 세상을 보게 하려는 왜곡된 흐름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잘못된 흐름의 한 가운데 바로 교과서 문제, 즉 과거에 대한 기억 문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본의 역사교육 문제는 일본 사회가 지켜온 민주주의에 대한 시험대이며, 소수자를 배려하고, 이웃나라와 함께 평화로운 열린 공동체로 한걸음 더 나아가느냐를 검증하는 시험대이기도 합니다. 역사인식․역사교육 문제는 우리 모두의 기억투쟁이자 평화투쟁인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전개된 한일협정 문서 공개운동 역시 강제동원 피해자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전제로서 자신의 권리가 국가권력에 의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운동이자 외교관료(국가)가 독점하고 있는 정보를 공개하기 위한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이 운동을 통해서 우리는 한국과 일본의 정보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경우, 정보 공개를 결정할 판사가 정보 자체를 보지 못하도록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국가가 주권자의 견제를 전혀 받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피해자의 권리를 찾기 위한 문서공개운동이 결국은 민주주의의 문제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국가는 정보를 통제함으로써 권력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은 주권자의 끊임없는 감시와 투쟁뿐입니다. 피해자의 권리와 민주주의, 그 어느 것 하나 그냥 주어진 것은 없었습니다. 이처럼 식민주의의 유산을 극복하는 운동은 피해자의 피해를 구제하고 권리를 회복하는 길이자 국가권력에 대해 책임을 물음으로써 사회의 민주화․인간화를 확대․강화해 가는 길과 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의 『한국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올해, 이제 부문별로 진행되던 국제연대 활동에 힘을 불어넣고,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대응을 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관련 단체들이 함께 문제를 풀어가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는 식민주의를 극복하자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당면과제로서 피해자들의 피해를 하루라도 빨리 치유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고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합니다.
 
첫째, 무엇보다도 당면 행동계획으로서 침략과정에서 발생한 일본군‘위안부’를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자 등의 피해실태를 밝히고, 피해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법적 조치를 취하도록 일본정부에 요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더 늦기 전에 피해자들이 살아있는 동안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조치가 단행되어야 합니다. 이는 일본정부가 최소한의 정치적 책임을 자각하고 피해자들의 호소에 답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진상규명을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을 촉구합니다. 과거를 극복하는 것은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제대로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과정에서 빚어진 ‘관동대지진 학살’과 난징대학살 등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완전히 말살된 '역사들'에 대해 우리는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새로 출범한 일본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려는 평화와 공존의 동아시아공동체 건설을 위해서도 이러한 조치는 선행되어야 합니다. 식민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일본의 신뢰를 회복시키는 주요한 계기가 될 것이며, 그 신뢰가 바탕이 될 때 비로소 평화로운 동아시아공동체 건설도 시작될 것입니다.
둘째, 조일수교정상화가 올바로 추진될 수 있도록 함께 힘을 모읍시다. 조일 수교는 양국간에 외교적 차원에서 식민주의를 청산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만큼 올바른 조약 체결이 추진될 수 있도록 국제연대를 강화해야 할 것입니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범한 잘못을 다시 밟지 않도록 조약 체결의 기본 이념과 방법에 대해 시민사회 차원에서 제안문을 만들어내길 희망합니다. 우리는 1990년 9월 평양에서 발표된 조선노동당과 자민당, 사회당의 '3당공동선언'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정당 차원이긴 하지만 공식적으로 합의한 바 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셋째, 한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나아가 전 세계에 뿌리내려 있는 식민주의를 타파하고 자유와 평등, 인권에 기초한 새로운 시대를 만들기 위한 공동선언을 채택하고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도록 합시다. 여기에 우리가 바라는 세계의 모습을 담아 세상에 공포하면 좋을 것입니다. 인종과 민족, 계급과 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고 억압받는 세계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받고 함께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그런 세계입니다. 따라서 2001년 인종주의와 인종차별, 외국인 혐오증이 반인류적 범죄임을 확인한 '더번선언'의 정신을 더욱 발전시켜 식민주의의 완전한 극복이 궁극적으로는 자유, 인권, 평등의 가치를 더욱 강화시키는 보편적 가치임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4. 결론을 대신하여
 
100년전 일제에 의해 한반도에 강제된 식민주의는 가해국과 피해국의 문제를 넘어 세계사 차원의 범죄행위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제국주의는 식민지에 대해 경제적 수탈만 일삼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식민주의는 인종주의나 민족우열론을 동원해 민족 억압과 차별․배제를 정당화했습니다. 또 식민지에 군림한 정권은 예외없이 일방주의에 기초한 폭력적 체제로서 식민지 민중의 일체의 인간적 권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식민주의는 민주주의의 적이기도 합니다. 식민주의는 식민지 민중의 정체정을 말살하는 문화적 제노사이드와 대규모의 학살을 예외없이 자행했습니다. 때로는 인종 청소의 형태로, 때로는 제국의 대외침략전쟁에 소모품으로 동원하여 간접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식민주의는 언제나 제노사이드를 내재하고 있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평화의 대척점에 서 있는 체제이자 이데올로기입니다.
100년전 시작된 일제의 조선 강점도 그러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일제 식민주의 역시 세계사적 식민주의의 한 전형이자 그 이상으로 한반도 민중에게 엄청난 고통과 피해를 입혔음을 알고 있습니다. 일제의 침략은 중국을 거쳐 아시아 각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는 그 정의롭지 못한 과거의 유산을 다시금 분명히 확인하고, 그 치유와 청산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열어 나아갈 공동의 의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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