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국가의 살인]

2009년 7월26일, 아프간 북부에 주둔 중이던 노르웨이 군인들이 복병을 만나 위급한 상황에 처해진 라트비아 군인들을 구출하려고 긴급 출동했다. 도중에 그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아프간 사람을 만났다. 제자리에 서라고 경고사격을 했지만 그 의미를 알아듣지 못했는지 아프간인은 서지 않았다. 그가 노르웨이 장갑차 가까이 다가오자 노르웨이 군인들은 하등의 의심도 없이 그를 조준 사격해 사살했다. ‘자살 테러리스트’라고 의심해 ‘자기방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중에 확인한 결과 그 아프간인은 어떤 무기도 소지하지 않은 단순한 민간인이었다. 언제 빨치산의 공격을 당할지 모르는 아프간 주둔 서방 침략군들의 눈에는 모든 아프간 남성이 ‘테러리스트’로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침략군으로서의 공포감일 뿐이다. 결국 노르웨이 군인들이 비무장 민간인을 죽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에 대한 노르웨이 당국의 반응은? 노동당(!) 대표자인 노르웨이 국방부 장관은 “매우 애석한 일이지만 노르웨이 군인들이 규칙대로 행동했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잘라 말했다. 서방 세력의 침공을 당한 ‘미개’ 지역의 주민이 ‘문명국’ 군인의 경고사격에 신경쓰지 않았다면 마땅히 사살해야 옳았다는 것이다.

 

 
 
» 지난 1월20일 새벽 서울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점거농성을 하는 용산구 한강로3가 한 빌딩에서 경찰이 강제 진압에 나서자 망루가 화염에 뒤덮이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명진 기자
 
 
 

 

모범적 복지국가의 사민주의적(!) 정부 대표자에게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듣는 게 적지 않게 놀라울 수도 있지만 실은 놀랄 것도 없다. 막스 베버가 내린 유명한 정의대로, 국가란 해당 사회의 유일한 합법적 폭력 기구다.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국가란 유일하게 ‘합법적 살인’을 할 수 있는 기관이다.

 

사민주의 국가서 일어난 공권력의 살인

 

물론 21세기 벽두의 대다수 ‘선진권’ 국가들은 적어도 평시에 자국의 ‘명실상부한’ 국민에게는 ‘합법적 살인권’을 남용하지 않는다. 미국과 일본 등 중요한 예외도 있지만 다수의 민주주의적 산업국들은 이미 사형제를 폐지한 지 오래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자국민’이 아닌 경우에는, 비록 ‘모범적 사민주의 국가’라 해도 합법적 살인을 얼마든지 행사한다.


예컨대 2006년 9월7일 노르웨이의 유서 깊은 고도인 트론헤임시에서 나이지리아 출신의 한 노르웨이 시민이 사회복지사무소에서 자신의 신청서가 거부된 데 대해 소리 높여 항의하는 등 ‘위협적인 듯한 행동’을 하자 출동한 경찰관들이 그를 붙잡는 과정에서 목을 졸라 죽인 일이 있었다. 그의 행동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는지 증언자들의 말이 엇갈리지만, 좌우간에 사회복지사무소 직원을 죽이려 하지도 않았으며 ‘물리적으로’ 죽일 만한 위치에도 있지 않았던 그는 경찰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를 질식사시킨 경찰은 어떤 징계라도 당했는가? 물론 아니다. 비록 노르웨이 여권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피부색이 달라 명실상부한 국민으로 인식되지 않는 유색인에 대해 선진권 국가는 얼마든지 ‘살인의 권리’를 행사한다. 세계에서 가장 평화스럽다는 노르웨이가 이 정도라면 코카서스나 이라크, 아프간에서 날마다 ‘테러리스트 용의자’(사실상 주로 민간인)를 죽였다는 자랑스러운 보도를 내는 러시아나 미국과 같은 군국들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미국이나 러시아 등 대국의 경우 타자를 합법적으로 죽이는 것은 국가 권위를 확립하는 주된 의례로 남아 있다.

구미권에서 합법적 살인의 대상은 주로 피부색이 다른 이방인이 되지만 ‘선진화된다’는 이명박 대통령 치하의 대한민국은 주로 저항을 시도하는 빈민들을 합법적으로 죽임으로써 자기확립을 한다. 용산 참사의 경우처럼 ‘국살’(國殺)을 당한 서민들은 사후적으로 보수 언론들로부터 ‘도심 테러리스트’의 호칭까지 받아 미국이나 러시아, 노르웨이 군경들이 죽이곤 하는 비유럽적 타자들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돈이 없는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원칙적으로 ‘비국민’이기에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1950년대 피 묻은 케냐의 풍경

 

국가는 계급사회 권력관계의 핵심이고, 생사여탈권도 그 권력관계의 핵심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국가가 쥐고 있는 합법적 살인 권리의 핵심성은 자명하다. 그런데 ‘국가적 살인 관련 행위’의 범위는 꼭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비서구 계통의 저항적 타자나 의심스러운 유색인종, 저항적 빈민에 대한 실제적 살해에 국한되지 않는다. 담론적 차원까지 보면, 국가는 예컨대 과거의 국가적 살인에 대한 합리화에 상당한 비중을 둔다. 융단폭격이나 원자폭탄 투하 등으로 미군과 영국군이 수백만 명의 민간인을 죽인 제2차 세계대전이나 6·25 전쟁은 지금도 국가의 공식 수사에서나 다수 미국인·영국인의 의식에서 ‘좋은 전쟁’으로 기억된다. 독일 도시들을 폭격으로 초토화하고 수십만 명의 민간인을 잔혹하게 죽인 처칠(1874~1965)이 영국 공영방송 < BBC >의 각종 여론조사에서 늘 “20세기 영국의 가장 위대한 정치인”으로 뽑히는 것을 보면, 국가적 살인을 합리화하는 교육과 언론 선전의 효과를 여실히 볼 수 있다.

합리화하기 어려운 ‘국살’은? 대체로 그냥 묻어둔다. 예를 들어 영국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케냐에서 1952~60년에 ‘마우마우’ 무장독립 운동을 진압했던 영국군은 32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1만527명의 적군을 섬멸했다”고 보고한 바 있다. 그들이 죽인 적군의 대부분은 빨치산을 도왔다는 혐의를 받던 민간인이라는 사실, 그들이 독립운동 진압 과정에서 수용소에 가둬놓은 약 16만 명의 원주민 중 다수가 빨치산과 아무 관련도 없었다는 사실, 당시에 그들의 고문실에서 거세를 당하거나 귀와 눈, 팔다리를 잃은 이들이 지금도 영국 정부를 상대로 힘겨운 소송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 등은 지면이 부족해 여기에 자세히 적어둘 수도 없다.

 

 
 
» 2006년 9월7일, 노르웨이 트론헤임시에서 긴급출동한 경찰들은 나이지리아 계통의 한 노르웨이 시민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질식사시켰다. 사건 이후 경찰 조사 과정에서 질식사 장면이 재현되고 있다. http://pub.tv2.no/nettavisen/innenriks/article1451701.ece
 
 
 

 

유족만 기억하는 공사판 인부의 죽음

 

그러나 과연 원주민들이 수만 명 단위로 영국군 고문기술자의 손에서 성기 고문과 강간, 기형적 방법에 의한 살해를 당했던 1950년대 중·후반의 피에 묻은 케냐 풍경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오늘날 영국에 많은가? 공영방송에서 가끔 고문·거세·강간·약탈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 소식이 들리지만, 이 문제에 대한 대중적 의식이란 거의 부재하다.

우리는 일본 사회의 ‘식민지적 과거에 대한 반성 부족’에 분노하지만, 사실 주류 일본 사회의 태도는 다른 옛 식민모국들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한국 사회라고 해서 과연 북파공작원들이 사살 내지 폭살한 북한의 군인과 민간인, 그리고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이 죽이거나 강간하거나 부상 입힌 베트남인 수만 명의 아픔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편인가? 더 이상 합리화하기 어려운 국살에 대한 은폐 일변도의 태도란 고금동서 국가들의 철칙이다.

 

국가의 폭력 기구에 의해 데모 현장이나 고문실에서 직접 죽임을 당하는 사람이라면 그나마 피해 집단 안에서라도 이름이라도 기억에 남는다. 어느 정도 진보적 성향을 지닌 한국인이라면 박종철(1964~87)이나 이한열(1966~87) 등 열사들을 과연 모를 수 있는가? 그런데 가시적 정치성이 부족한 국살들은 대체로 대중적으로 망각되고 직접적 피해자의 유족에게만 기억된다.

청소년의 ‘객기’를 꺾어 그를 자신의 인권을 의식할 줄 모르는 순종적 ‘인간 기계’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 체벌의 피해자들이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박정희·전두환 시절에 배움터에서 스승이어야 했을 어른한테 얻어맞아 죽은 아이들의 이야기는 제쳐두고 최근의 일부터 보자. 2007년 7월4일, ‘민주화’가 다 됐다는 개명 천지에서 부산 남구의 한 중학교 학생이 ‘성적이 나쁘다’는 이유로 학교 복도를 오리걸음으로 왕래하는 체벌을 받던 도중 죽고 말았다. 국가 공무원인 교사가 ‘순종 훈련’을 시키는 과정에서, 즉 국가의 폭력 행사에 의해 죽은 것이다.

 

폭력적 남성성의 고정화

 

이 사건에 대해서는 사회가 제대로 된 반응이라도 보였는가? 인권단체야 규탄집회를 여는 등 대응을 했지만 대다수 언론은 이슈화하지 않아 전체적인 사회의 반응은 미약했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은 전국적인 ‘사건’이 되지만 국가가 한 어린 생명을 빼앗은 일이 ‘사건화’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미시적 차원의 국가 폭력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지,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의식에서 사망자의 지위가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다주는지 잘 보여준다.

학생의 죽음도 별다른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지만, 국가와 자본의 직무유기와 이윤 극대화가 가져다주는 노동자의 죽음도 ‘주류’의 관심 밖이다. ‘선진화’를 지향한다는 대한민국의 산재 사망률은 인구 10만 명당 30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최고 수준이고 2위인 멕시코에 비해서도 약 3배 더 높다. 한국보다 산재 사망률이 20~30배 낮은 영국 등 유럽 국가들과는 비교하기조차 민망한 수준이다. 국가와 자본, 특히 건설회사 등이 재해 방지에 약간의 관심과 돈을 들이기만 했다면 얼마든지 예방됐을 수도 있는 사고로 하루에 건설 부문에서만 약 2명꼴로 죽어가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예컨대 저출산 문제만큼이나 언론과 여론이 관심을 돌리는가? 매년 4월28일이 산재 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로 정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과연 대한민국 국민 몇%나 될까?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는 중산층을 위시한 ‘국민 모두’의 문제지만, 국가의 감독 소홀(직무유기)과 자본의 탐욕으로 안전장비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고층건물 공사장에서 떨어진 가난뱅이 인부의 사망은 유족만의 문제일 뿐이다.

국가가 가난뱅이들을 학교와 군대에서- 꽤나 가혹하게- 훈육하고 명령을 잘 듣는 순종적 노동자로 만들지만, 그들의 생명에는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는 게 현실이고 국가의 기본적 체질이다.

 

이번 연재는 ‘국가에 의한 살인’에 대한 전면적 해부를 목적으로 한다. 고대국가가 처음 만들어진 약 5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세계가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전쟁 없는 기간’은 기록상 알 수 있는 한 채 30년도 되지 않는다. 이 끊임없는 전쟁을 합리화해온 주된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전쟁 합리화에 종교와 철학이 어떻게 합세해왔는지가 해부 대상이 될 것이다. 지금도 미국과 중국,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등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기축적’ 지역에서 존속되는 사형제가 세계사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가라는 문제도 비중 있게 다뤄질 것이다. <일리아드>부터 <람보>나 <300>까지 군사적 폭력이 어떻게 문화적으로 낭만화돼왔는지, ‘폭력적 남성성’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고정화돼왔는지도 이 연재의 또 하나의 중요한 초점이 될 것이다. 뉴스 보도나 역사 교과서를 통한 전쟁의 ‘당연화’, 사법부가 웬만하면 면죄부를 주는 경찰의 상습화된 살인적 폭력, 노동자의 죽음이나 부상에 대한 사회의 태도… 이 모든 문제를 세계사적 차원에서 조명하면서 우리가 거의 내면화해 당연시하는, 사실상 우리를 포로로 잡고 있는 국가의 폭력을 다면적으로 다뤄보려 한다.

 

권력의 야만성 들춰낼 것

 

전쟁과 양민 학살 속에서 태어났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병역거부자를 감옥에 보내고 있는, 병영 문화를 학교와 직장에까지 확산시킨 천하의 군국 대한민국은 지금 다행히도 전쟁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국가 폭력 기구에 의해 늘 어느 정도 동원돼 있는 상태다. 인터넷 포털 뉴스를 볼 때마다 군복무 중인 인기 연예인은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대한 건아답게 군 생활을 한다”고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함으로써 군복무를 ‘남자의 당연한 의무’로 만들고, 회사마다 직원들을 해병 캠프에 보내거나 군대식 극기훈련을 시키는 게 인기 있는 ‘사기 진작 방법’으로 통한다. 회식 자리에서 상사의 구령에 따라 일제히 일어나 “위하여!” ”건배!“를 큰 소리로 외쳐대는 월급쟁이들의 모습에서 우리 삶에 스며든 군대의 살기를 그대로 발견한다. 또 한편으로 쌍용자동차 점거 농성에 대한 살인 진압이라는 국가 폭력 행사를 다룬 뉴스를, 다수의 한국인들은 그냥 볼거리로 취급했다. 국가 폭력에 대해 일찌감치 무감각해진 것이다. 우리에게 이미 당연시돼 더는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는 권력의 야만성을 들춰냄으로써 사회의 비폭력화에 약간의 도움이라도 보태려는 것이 이 연재의 기본 취지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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