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우월성을 넘어 다양성의 시대로

미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여성 프로 골프 선수의 활약은 한국인들에게 기쁨을 안겨 주는 소식이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실의에 빠지고 자신감을 잃었던 한국인들에게 지난 시절 식민지배와 전쟁의 역경을 이겨냈던 투지를 되살려 준 건 박세리의 ‘맨발의 투혼’이었다. 1998년 유에스 오픈(US Open)에 출전한 박세리는 마지막 홀에서 연못가로 굴러 떨어진 공을 포기하지 않고 맨발로 물에 들어가 쳐내는 투혼을 발휘했다. 물에 들어가 공을 쳐내는 박세리의 경기 장면은 이후 역경을 이기고 희망을 갖자는 공익광고의 단골 이미지가 되었다.

 당신은 한국인입니까?

 미국 프로 골프 리그 뉴스가 이처럼 한국인에게 격려와 기쁨을 안겨 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한국 언론에서 위성미와 김초롱으로 보도하는 미셀 위(Michelle Wie)와 크리스티나 김(Christina Kim)은 한국계 미국인 선수들로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미묘한 민족정서를 불러 일으켰다. 미국 언론과 달리 한국 언론들은 이 선수들의 활약을 박세리나 김미현 선수처럼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사례로 보도해 왔다. 한국의 골프 팬들도 마찬가지로 여겼다. 그러나 2004년 한국 대표로 한일대항전에 출전했던 김초롱 선수가 미국과 유럽 선수간의 골프대회인 솔하임 컵 대회에서 미국 대표 선수로 참여한 것이 갈등의 계기를 만들었다. 특히 얼굴에 성조기를 그려 넣고 미국 팀을 열렬히 응원하며 경기에 참여한 김초롱 선수의 사진은 한국인 팬들에게 당혹감을 안겨 주었다. 또한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초롱 선수가 자신은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보도되자 한국인 팬들 중에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 사람들이 생겨났다. 특히 사이버 공간에서는 김초롱 선수를 한국인으로 보도하는 언론이나 한일전에서 한국 대표 팀으로 발탁한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를 비난하는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김초롱이라는 이름 대신에 이제는 ‘크리스티나 킴’으로 불러야 한다는 비난성 댓글이 늘어났다.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입국하여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고 국적을 취득한 파키스탄 이주노동자의 경험은 한국계 미국인 골프선수와는 다른 국면의 상황을 보여준다. 낯선 한국 땅에서 이주노동자로서 힘든 삶을 살던 이 남성은 결혼 후 경기도의 한 도시에서 본국에서 수입한 식료품을 파는 작은 상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마침내 한국 국민이 되었다는 기쁨으로 의욕에 찬 생활을 하던 중 호기심에 가게를 들어 온 행인과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자신을 외국인 취급하는 손님에게 나도 한국인이라며 자랑스럽게 주민등록증을 꺼내 보여주자 한국말도 어눌하며 이국적 외모가 너무나 뚜렷한 파키스탄인이 어떻게 한국인이냐며 손님이 화를 낸 것이다.

 이 두 사례는 급증하는 국제이주의 결과로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변화와 갈등의 양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 사회는 전지구화 시대 글로벌 사회로 이행하면서 너무나 분명했던 기본적 범주, 즉 ‘한국인’이나 ‘한민족’ 같은 개념들을 새롭게 재구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다양한 문화를 존중하고 이를 통해 더욱 풍성한 공통의 문화적 가치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도전적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민족정체성 형성의 역사적 배경

 한국인의 ‘민족공동체’와 ‘민족정체성’의 형성은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형성되어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현대 한국 사회의 민족정체성이나 민족정서를 읽어내는 중요한 전제가 될 것이다. 현대 한국 사회의 민족정체성이 수천 년을 내려 온 변치 않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역사적 경험에서 이민족과의 접촉과 교류는 다양한 형태로 축적되었다. 고구려의 경우 오늘날의 만주 일대까지 그 세력을 넓혀 다양한 북방의 여러 민족과 교류했고,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들은 말갈과 같은 이민족과 함께 발해를 건설하여 다민족 사회를 형성하기도 했다. 가야에는 아유타국(阿踰陀國)에서 온 허황옥(許黃玉)이 왕비가 되어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유타국의 실제 위치에 대한 다양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인도를 비롯한 다른 민족과의 접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0세기 발해가 멸망한 이후 한민족의 역사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에 국한되었다. 왕조는 변하더라도 동일한 영토 내에서 역사적 운명을 공유하는 공동체 의식이 쌓여 갔다. 고려 시대에는 활발한 대외 교역으로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문화적 성취를 이루어 냈다. 고려 상인들의 적극적인 대외무역은 중국뿐만 아니라 서역이나 아랍의 상인들에까지 이르렀고, 이들과의 교역을 통한 문화 수용은 다른 어떤 시대보다 활발했다. 다만 13세기 원나라의 침략은 정치적 지배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몽골인의 문화를 강요 받아 자율적인 이문화 수용에 제동이 걸렸다.

 조선 시대는 한민족의 문화적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성리학을 수용하면서 지배층의 문화를 성리학에 근거한 유교문화로 재편한 것이다. 특히 17세기 신유학의 도입으로 더욱 강력한 유교 국가를 건설한 조선 왕조는 유교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백성을 교화해 나갔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강화된 명나라와의 양국 관계는 성리학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는 명분과 함께 조선 시대 문화적 정체성의 큰 축이 되었다. 조선 사회의 유교적 세계관은 성리학을 수용하지 않는 다른 국가나 민족을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세계관은 조선 시대에 이주민을 대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조선 왕조는 외국에서 건너 온 이주민들을 일반적으로 관대하게 대우했다. 특히 중국 왕조의 멸망에 따라 난민으로 이주해 온 송과 명의 유민은 고려 시대 이래로 우호적인 대우를 받았다. 중국이 아닌 일본과 만주에서 이주해 온 외국인들도 일정 기간 세금과 요역(徭役: 강제 노동)의 의무를 면제해 주었으며, 군 복무는 이주자들의 정착을 지원하기 위해 3대에 걸쳐 면제해 주었다. 이주민에 대한 관대한 정책은 상당한 규모의 외국인이 조선 사회로 편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 초기 태종 무렵에는 경상도 지역에 정착한 일본인이 2,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유교적 세계관을 가졌는가 아닌가의 문제

 이러한 역사적 자료들은 이주민들이 조선 사회에서 적어도 정책 차원에서는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 받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다만 당시의 세계관이었던 유교적 가치를 공유하는가에 따라 대우의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송이나 명국의 유민들 중 학식이 있는 자는 중용되었으나 만주 지역에서 이주한 여진족이나 일본인의 경우 관직에 오를 때 반대가 있기도 했다. 아직 조선의 문화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기에 관직에 오를 수 없다는 논리였다. 민족이나 출신 지역이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전통을 공유하는가가 중요한 기준이었음을 보여 준다.

 유교적 세계관의 공유를 강조한 조선 사회의 문화적 정체성은 조선 왕조가 겪었던 두 차례의 주요 전쟁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15세기 일본과 17세기 청나라의 침략이 조선 사회에 끼친 충격과 피해는 컸다.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이 두 나라 모두 야만의 단계에 머물러 있던 변방의 민족들이 세운 왕국이었다. 전쟁의 참화는 역으로 성리학의 문화적 자긍심을 더욱 고취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 사회가 유교적 전통을 중심으로 문화적 동화를 강조한 것은 외국인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유교적 학풍에 따라 학맥을 형성하고 반대편과 집요한 논쟁을 벌인 조선 사회의 지배층은 유교적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 즉 문화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것이 계급을 막론하고 사람의 기본을 세우는 도리라고 강조했다. 장자(長子)로 이어지는 혈통의 질서를 세우며 핏줄의 순수함을 강조한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유교적 세계관을 구현해내는 실천적 방안의 하나였을 뿐이다.

 지배층의 당위론적 정책 외에 일반 백성들이 일상생활에서 이주민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생활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18세기 박지원은 자신의 소설 <허생전>에서 명나라 멸망 후 조선으로 피신한 유민들의 삶을 짧게 소개한 바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인 허생은 유교적 세계관을 공유했던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를 응징하자며 북벌론을 주장하는 왕실과 사대부들의 위선을 드러내기 위해 조금은 과격한 제안을 한다. 그렇게 명나라와의 의리를 강조한다면 의리를 믿고 조선으로 피난 온 명나라 난민들이 유리걸식하며 홀아비로 떠돌게 둘 것이 아니라 왕실의 여자들을 아내로 주어 정착하게 하라는 제안을 한다. 박지원은 허생의 입을 빌려 명분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는 조선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자 했지만,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유교적 학식을 갖추지 못한 많은 유민들이 조선 사회에 통합되지 못하고 고초를 겪었다는 점이다.

 박지원이 바라 본 조선 사회는 성리학의 전통을 중시하여 명과의 의리를 강조하고 북벌을 통해 유교적 세계관을 고수하고자 한 사회이다. 북벌을 달성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전략들도 유교적 세계관에 어긋난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회였다. 명나라 다음가는 유교 문화 국가라는 의식이 조선 사회의 문화적 정체성의 근간인 것이다.

 일제 강점 하 단일민족 이념의 강화

 이러한 유교 문화 정체성은 20세기 들어 문명사적 전환 속에서 시련을 겪는다. 제국주의적 질서가 재편되는 시기 조선은 새로운 문명과 기술을 온전히 접하거나 수용할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열강의 통상 요구가 제국주의적 침략의도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개방을 통해 새로운 문명과 기술을 수용하기보다는 외국의 문물을 거부하는 정책을 선택하고 말았다. 성리학의 정도를 지키기 위해 정도가 아닌 서양의 문명을 거부하게 된 것이다.

 1910년 일제의 식민통치하에 놓인 한민족은 본격적인 민족 차별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나라를 빼앗긴 것뿐만 아니라 일제의 강압적 동화 정책으로 민족의 생존 자체를 위협 받기 시작했다. 한국어 사용이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의 이름을 일본 이름으로 바꾸게 한 것은 민족의 뿌리를 없애는 정책이었다. 이러한 민족의 위기는 근대적 민족의식을 촉발시켰다. 특히 일본의 식민주의 동화 정책에 저항하기 위해 민족의 고유한 혈통과 계보를 강조하여 단군의 후손이라는 단일민족 이념을 강화했다. 한국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 일제의 식민정책은 독립 이후 언어공동체로서의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강제적 동화를 추진했던 일제의 식민정책이 단일민족론과 문화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를 만들어 냈다면 독립 이후 남북 분단과 전쟁의 경험은 민족주의를 심화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모든 문화는 평등하고 소중하다

 한국의 민족정서는 이처럼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형성된 역사의 축적물이다. 시대적 환경은 매 시기 민족정체성이나 문화적 정체성의 형성과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민족정서는 20세기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이 반영된 것이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문화적 정체성이 확연히 다른 것처럼, 이제 한국 사회는 세계화라는 시대적 변화에 따라 민족정서와 문화적 정체성을 재구성해야 할 때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국경을 넘나드는 이주로 인해 그 범주가 변하고 있다. 한반도를 떠나 전 세계로 흩어진 한민족의 규모가 600만 명을 넘어섰고, 한국 사회로 이주해 오는 외국인들 역시 100만 명을 넘어섰다.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이주하는 여성들은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한국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으며, 이주노동자들도 본국으로 귀환하는 대신에 한국 사회에 정착하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은 ‘국민(nation)’과 ‘민족(ethnic group)’을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민족은 다르지만 한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나 한민족이지만 다른 나라의 국민으로 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같은 한국 국민이지만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고, 같은 한민족이지만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하거나 전혀 다른 문화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한 규모에 이른다.

 한국 사회의 과제는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로 모아진다. 다민족, 다문화 사회로 이행하는 한국 사회가 단순히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는 수준이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을 자산으로 성숙한 문화적 성취를 이룩해 내야 한다는 점에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고 있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에 저항하며 형성된 단일민족론과 순혈주의는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보다 오랜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는 문화적 우월주의에 대한 성찰이 더 필요한 시점이다. 성리학적 세계관에 근거한 조선 사회의 문화적 우월주의나 문화적 동질성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오류일 뿐만 아니라 현실과도 맞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새롭게 재구성되는 한국 사회 혹은 한국인은 민족과 문화의 다양함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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